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사설

[사설] ‘강기훈 무죄’ 앞에 왜 사과는 없는가

등록 2015-05-14 18:33

진실은 결국 승리했다. 유서를 대필해 동료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참혹한 누명을 쓰고 24년간의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던 강기훈씨가 14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1991년의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이 공안세력의 광풍으로 조작된 사건임이 마침내 확인된 것이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지만, 이제 이 사건은 ‘유서대필 사건’이 아니라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기록돼야 한다.

진실은 승리했지만 반성과 사과는 끝내 없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과 경찰, 법원 등의 국가기관은 진실을 조작하고 오랫동안 은폐하는 데 한몸이었다. 1991년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마치 주문에 맞추려 한 듯 무리한 과정을 거쳐 자살한 김기설씨의 필체와 유서 필체가 다르다는 억지 감정을 내놓았다. 감정의 원칙도, 합당한 절차도 무시된 결과였다. 이를 앞세워 검찰은 강압수사로 자백을 강요하고 피의자의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은 위헌적 증거를 엮어 강씨를 자살을 방조한 파렴치범으로 몰았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사람 목숨을 수단으로 삼는 비인간적인 집단이라는 매도도 이어졌다. 법원은 눈에 뻔한 거짓을 외면한 채 강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수십년의 세월이 걸려 진실을 밝혀냈지만, 검찰과 법원은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진실 조작을 드러내는 증거를 찾아 2008년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재심을 결정하기까지 3년 넘게 머뭇거렸고 서울고법 재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에 대해서도 1년 넘게 확정을 미뤘다. 24년 동안 한 인간을 병마에 몰아넣을 정도로 고통을 주고 괴롭힌 것을 사과하거나 위로하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현을 지연시킨 데 대해서도 반성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면, 지금의 대법원은 비겁하기 그지없다.

검찰은 더하다. 검찰은 재심이 개시된 뒤에도 강씨가 새로운 증거조작을 하고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검찰은 이번 사건 말고도 지난 수십년 동안의 숱한 진실 조작과 사건 왜곡에 대해 단 한번도 반성하고 사과한 일이 없다. 이런 검찰은 공익의 대변자도, 신뢰를 받는 온전한 사법기구일 수도 없다. 진실 왜곡에 일조한 대가로 출세를 했다고 한들 역사 앞에 죄인으로 기록되는 것은 면할 수 없다.

강기훈씨의 무죄 확정은 100여년 전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진실을 왜곡하려는 힘에 고통받는 이들도 희망을 얻을 수 있기 바란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