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갈수록 악화하면서 오는 14일부터 예정된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일정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의 방미 일정 변경은 득실을 세심히 따져봐야 할 문제다. 방미를 통해 한국이 얻어낼 외교적 성과는 무엇인지, 한-미 정상회담의 의제와 예상되는 결과는 무엇인지, 방미 취소가 외교적 결례는 아닌지 등 외교적 문제와 함께 메르스 사태의 추이와 국민 여론 등을 복합적으로 살펴봐야 할 사안이다.
한-미 관계의 중요성에 비춰볼 때 양국 정상이 자주 만날수록 좋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보면 현시점에서 두 나라 정상 간에 긴급히 다뤄야 할 의제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묘안이 정상회담에서 도출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미국 쪽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문제가 논의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압박 강도를 높여온 최근의 흐름을 고려하면 박 대통령의 방미 기간 동안 압박의 고삐를 더 죌 수도 있다.
국내 비상 상황 때문에 미국 방문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국도 양해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2013년 7월 미국 연방정부의 셧다운 사태 때문에 애초 예정됐던 아시아 방문을 연기한 적이 있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가 8일 한국에 대해 여행주의보를 발령한 것도 눈여겨볼 사안이다. 자칫 한국의 방미 수행원들이 미국 공항에서 까다로운 입국심사와 방역조처를 받는 난처한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다.
물론 중국과 일본이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는 등 새로운 흐름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모처럼 잡은 한-미 정상회담 일정을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번 가을에 미국을 방문할 예정으로 돼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이 박 대통령 방미의 적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지금의 메르스 사태의 엄중성과 그동안 정부가 보여온 무능·무책임한 태도를 돌아볼 때 박 대통령의 방미는 득보다 실이 많아 보인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중대 사태 속에서 국정 최고책임자가 외국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국민의 시선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위기 극복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앞으로의 순탄한 국정운영을 위해서도 훨씬 낫지 않을까. 물론 최종 판단은 청와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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