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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대통령 시종’ 자인하는 여당의 국회법 폐기 방침

등록 2015-06-26 18:35수정 2015-06-26 23:40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6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개 사과했다. 유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대통령의 헌신적인 국정 운영을 여당이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해 송구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여야가 합의한 법률안을 거부한 대통령에게 제1당의 대표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물론 이런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박 대통령에게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횡포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순종해 버리는 국회의원들의 태도가 입법부를 추락시키고 삼권분립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국회의 권위는 의원 스스로 지켜야지 다른 누가 지켜주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재의 요구(거부권)를 떳떳하게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치지 않고 자동 폐기시키는 방식으로 흐지부지하겠다고 결정한 건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새누리당 스스로 한번 되돌아보라. 국회법 개정안은 새누리당 반대에도 야당 혼자서 입법한 게 아니다. 여야가 합의해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고,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거친 뒤 절대다수의 의원들이 자유의지로 이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렇게 만든 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했다고 해서 그냥 폐기해 버리자는 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스스로를 청와대의 거수기 수준으로 전락시키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과거에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면 정보기관에 불려가 고초를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겁박당한 의원들은 곧바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꿔버리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휘두르던 1970년대 유신 시절의 얘기다. 40여년 전엔 그래도 물리적 폭력이라도 있었는데 지금 여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말 한마디에 겁에 질려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고 삼권분립의 가치를 내던지니 애처롭기 짝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데 대해선 입법부 수장인 정의화 국회의장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얼마 전 정 의장은 새누리당 국회의원 2명의 청와대 정무특보직 겸직을 ‘법률적으로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국회의원이 오히려 행정부를 이끄는 대통령의 참모 노릇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위법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니, 그런 게 하나하나 쌓여 대통령이 국회를 업신여기고 입법부 위에 군림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그나마 이번에 정의화 의장이 “대통령의 재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 본회의에서 재의에 부치는 게 당연하다”고 밝힌 건 다행스럽다.

미국에선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률 10건 중 3건을 의회가 재의결해서 법제화했다. 국회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대통령과 대립하는 건 국정 혼란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국회의원들이 바라봐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는 유승민 원내대표도 그렇지만, 이런 굴욕을 수수방관하는 새누리당 국회의원 160명 모두가 국민의 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이 재의 요구한 국회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해서 정정당당하게 표결하는 게 옳다. 그게 안하무인인 대통령에 맞서 국회의 권위와 체면을 세우는 최소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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