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가관이다. 지금 새누리당 사태를 보면, 우리 정치가 서 있는 지점이 과연 21세기가 맞나 헷갈릴 정도다. 숱한 비판과 정치 불신 속에서도 의회민주주의가 조금씩 발전해 왔다고 믿었는데,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 40년 전의 군사독재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를 놓고 벌이는 싸움은 한국 정치의 퇴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새누리당 최고위원회는 29일 오후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김무성 대표는 “최고위원들이 많은 얘기를 했고, 유승민 대표는 경청했고 고민하겠다고 했다. 당을 위해서 (유 대표에게) 희생을 통한 결단을 부탁한다는 간곡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고 해서 최고위원회에서 원내대표의 거취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한 편의 코미디다. 원내대표는 당헌에 따라 의원총회에서 선출되니, 재신임 역시 의원총회에서 이뤄지는 게 맞다. 대통령이 시대착오적이니 여당 최고위원들마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데 주저하질 않는 듯하다.
정당에서 국회 대책의 사령탑인 원내대표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거취를 논의할 수 있고 잘못을 추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체는 삼권분립의 한 축인 국회의원들이 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유승민 대표를 ‘배신자’로 꼭 집어 지목한 대통령 발언을 계기로 난데없이 청와대 참모들과 친박 의원들이 나서 유승민 대표를 쫓아내려 하니 동티가 나고 논란만 커지는 것이다. 대통령 한마디에 의원총회에서 선출한 원내대표를 갈아치워야 하는 정당이라면, 아예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지명하지 굳이 국민 손으로 뽑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1970년대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해 ‘유정회’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마 그때가 그리운 모양인데, 시대가 변해서 원내대표를 바꾸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29일 새누리당 재선 의원 20여명이 사실상 박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성명을 낸 건 상징적이다. 재선 의원들은 “당내 일부에서 원내대표 사퇴를 주장해 분란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결정된 것을 의원들의 총의를 묻지 않은 채 최고위원회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고 유승민 대표 사퇴에 반대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유승민 사퇴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같은 날 보도됐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새누리당 내 친박 의원들은 이런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명분도 없고 원칙도 없고 여론 지지도 못 받는 ‘원내대표 찍어내기’를 청와대 스스로 거둬들이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다. 늦었지만 그게 박 대통령이 정치적 타격을 덜 받는 길이다. 새누리당 의원들 역시 시대의 퇴행을 막고 정치 불신을 멈추기 위해선 좀 더 용기 있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손으로 뽑고 재신임까지 했던 원내대표를 청와대 압력으로 내쳐 버린다면, 대통령의 제왕적 권위는 살아날지 모르나 당-청 관계는 폭압적인 독재 시절로 회귀할 것이다. 국회의 권위와 삼권분립 정신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곧 열릴 예정인 새누리당 의원총회는 정당민주주의 진퇴를 가늠하는 일대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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