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해킹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27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현안보고에서 이병호 국정원장이 “직을 걸고 불법사찰한 사실이 없다”며 민간인 사찰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국정원은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씨가 자살하기 전 삭제한 파일의 복구·분석 결과에 대해서도 대북·대테러용 10건, 국내 실험용 31건, 실패 10건 등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설명 없이 숫자만 나열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뤄진 31건의 실험은 반드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있어야 할 대목이다.
아무리 국정원이 비밀 정보기관이라고 해도 국민적 의혹이 일고 있는 사안에서 객관적인 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채 ‘믿어달라’는 강변만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식의 읍소는 비공식적인 친목모임에서나 통할 일이지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다. 법치국가라면 법과 원칙, 명확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시비를 가리고 그에 따라 조처를 해야 한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중대 의혹과 관련해 당사자의 말뿐인 해명만 믿고 어물쩍 넘어간다면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정보기관이라도 법 밖에 군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간 전문가가 비밀 엄수를 서약한 뒤 해킹 관련 자료를 조사하도록 하자는 야당의 제안에 대해 국정원이 내놓은 역제안도 같은 맥락에서 부적절하다. 국정원은 ‘자료를 직접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신 국정원 기술자와 간담회를 통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객관적 정보가 전제되지 않은 채 어떻게 말로만 이해를 시키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관련 자료를 하나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공언이나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이탈리아에서 사들인 해킹 프로그램으로 카카오톡 도청이 불가능하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자세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믿어달라’는 수준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설령 국정원의 설명이 맞다고 하더라도 민간인 사찰 의혹을 씻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내용이다.
결국 정보위 현안보고는 국정원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는 자리밖에 되지 못했다. 오죽하면 한 정보위원은 ‘다 믿어달라고만 하는 교회 분위기 같았다’고 평가했을까. 이런 행태가 국정원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민간인 사찰 의혹을 더 키운다는 사실을 국정원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국정원의 안보역량에 대한 심각한 훼손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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