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4일 오후 각의 결정을 통해 패전 70년을 결산하는 이른바 ‘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앞선 대전 때 한 것에 대해 반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의 기분을 표명해왔다”며 “그런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부가 과거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해 반성, 사죄한다고 밝힌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및 2005년 고이즈미 담화와 같이 가해 주체와 피해 객체를 명확하게 표시하지는 않았으나 장황한 담화 곳곳에 이런 표현을 마치 보물찾기 놀이에서 보물을 숨기듯 분산 배치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형식상으로는 역대 내각이 표명한 ‘침략, 식민 지배, 사죄, 반성’이란 핵심 단어를 빼놓지 않고 집어넣은 모양새를 취했다.
또 담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담화의 앞뒤에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었던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20세기 전시하에 많은 여성들이 존엄이나 명예가 깊이 상처받은 과거를 이 가슴에 새겨나가겠다”고 되풀이한 대목이다. 이는 직접적인 명시를 하지 않으면서 한-일 간 최대 갈등 사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의식한 표현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아베 담화는 4월 반둥회의 60주년 기념행사 및 미국 의회 연설에서 표명한 과거사 인식보다는 진전한 내용이지만, 한국 정부가 기대하는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강한 역사수정주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아베 총리가 이 정도나마 타협적인 내용의 담화를 내게 된 것은 아베 총리의 처지가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과, 연립 상대인 공명당을 비롯한 일본 안의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담화문에 침략, 식민 지배, 사죄, 반성이라는 단어를 다 집어넣기는 했지만, 간접화법을 사용하거나 일반적인 역사 서술 가운데 추상적으로 포함시키는 등의 교묘한 언술을 사용한 것은 역대 내각의 패전 담화에서 후퇴한 것일 뿐 아니라 품격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지칭하는 듯한 표현을 반복하면서도 누가 어떻게 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유체이탈’ 화법으로 얼버무린 것도 일본 정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에서 한참 뒤로 물러선 것이다.
아베 총리가 이렇게 애매모호한 수준의 담화를 내놓음으로써 우리 정부도 고민을 안게 되었다.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걸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요구를 완전히 수용한 것도 내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우리의 요구를 수용한 면도 있는 만큼,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실질적인 내용으로 이끌어내느냐는 우리 정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총리가 담화를 준비하기 위해 만든 ‘21세기를 구상하는 간담회’가 6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대일정책은 이성과 심정의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한국 정부가 역사 인식 문제에 있어 ‘골포스트’를 움직여온 경위가 있다”고 적고 있다. 앞으로 한-일 간에 인식 차이를 좁히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잘 보여준다. 이런 일본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외교 당국은 더욱 철저한 논리와 끈질긴 자세로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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