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출범한 ‘주빌리은행’은 우리나라에서 ‘착한 금융’ 운동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금융기관 문턱을 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소액의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 등의 활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아예 빚을 탕감해주는 주빌리은행의 파급효과와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빚에 짓눌린 취약계층을 벼랑으로 내모는 대신 사회의 품으로 끌어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연체한 채무 취약계층은 350만명가량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114만명은 사실상 부채 상환이 불가능한 장기 연체자들이다. 금융기관들은 장기 연체 대출채권을 손실처리한 뒤, 원금의 1~10%를 받고 대부업체 등에 팔아왔다. 대출채권을 사들인 대부업체들이 법을 어기고 혹독한 빚 독촉에 나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아든 배경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혹독한 빚 독촉 관행도 포함될 게 틀림없다.
빚 탕감 운동의 성과는 나라 안팎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다. 주빌리은행의 원조 격인 미국의 ‘롤링주빌리 프로젝트’는 2012년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약 380억원 규모의 빚을 덜어줬다. 국내에서도 일부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돼 지난해 4월 이래 792명(약 51억원)을 빚의 고통에서 해방시켰다. 주빌리은행 출범 당일에도 2000명이 탕감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대형 대부업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빌리은행에 부실채권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뜻을 꺾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들 대부업체한테 직접 빚을 진 연체자들은 탕감 혜택을 누릴 수 없다. 1·2차 금융기관 연체자에 비해 대부업체 연체자의 형편이 못하면 못했지, 더 낫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민간의 기부금에 기댄 주빌리은행 방식의 지속가능성엔 한계가 있다. 빚 탕감 운동의 주된 대상은 애초부터 정부가 재정정책으로 보살펴야 할 취약계층이다. 예산 1조만 취약계층 빚 탕감에 투입하더라도 50조원의 빚을 영원히 없앨 수 있다.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노역을 사는 사람들에게 기부금으로 무담보·무이자 대출에 나선 ‘장발장은행’이 재원 부족으로 어려움에 빠진 건 시사하는 바 크다. 빚 탕감 운동의 첫걸음은 민간 부문이 내디뎠으나 끝까지 이끌고 가는 건 정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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