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게시물을 심의해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24일 인터넷상의 명예훼손에 대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도 심의를 신청할 수 있도록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7월 이런 방침이 알려진 뒤 시민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침해를 우려하는 반발이 거셌지만 그대로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제3자 심의 신청 제도는 대통령, 고위 공직자, 정치인, 기업인 등 권력층 인사들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고 이들에 대한 사이버 공간의 평판을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천만한 제도다. 권력층 인사들은 인터넷에 비판 글이 올라도 조심스럽게 대응해온 측면이 있다. 확고한 명분이 없는 한 직접 나서는 게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공적인 사안에 대해 사실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 비춰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제3자 심의 신청 제도가 도입되면, 정체불명의 제3자나 단체를 내세워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의 삭제를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광범위한 여론조작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특히 대통령·정치인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지는 선거 국면에서 방심위가 불공정한 잣대로 인터넷 게시물을 삭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선거의 공정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하게 된다. 방심위는 9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정부·여권 추천 위원이 6명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다.
이런 지적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는지 박효종 방심위원장은 “공인의 경우 사법부가 유죄 판단을 내린 경우에 한해 (제3자 심의 신청을) 적용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바 있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에는 그 내용이 빠졌다. 방심위는 위원장마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한 제도를 밀어붙임으로써 정당성 없는 일을 꾸미고 있음을 자인한 꼴이다. 방심위가 내세우듯 이 제도가 미성년자·장애인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들에게 엄격히 국한해 적용하도록 규정을 만들면 그만이다.
최근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대학 시절 추문이 폭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충격적인 내용이지만 정작 근거는 제시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캐머런 총리는 유머로 맞받았을 뿐이다. 공인의 명예훼손을 대하는 태도는 그 나라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그렇잖아도 우리나라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 견줘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을 과도하게 제재하고 있는데, 이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겠다는 식의 제도까지 등장하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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