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3일 국무회의에서 올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예산 44억원을 예비비로 충당하기로 몰래 의결했다고 한다. 예산심의권을 가진 국회를 우회하기 위해 편법을 쓴 것인데, 교육의 기본인 교과서 편찬 작업을 이렇게 군사작전 하듯 비밀리에 졸속 추진해도 되는 건지 아연할 따름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정당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얼마나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듯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부 스스로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의 지출 또는 예산 초과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가 예비비를 쓸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천재지변이나 재난으로 긴급하게 예산을 써야 할 경우 정부가 먼저 예비비를 집행한 뒤 국회엔 사후보고를 할 수 있게 규정했다. 즉 ‘예측하지 못한 긴급한 사태’에 신속하게 대응하라는 게 예비비의 목적이다.
그런 예비비를 교과서 편성 작업에 쓴다는 건 위법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명백하게 편성 취지를 어기는 행위다. 이런 식으로 예산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정부의 모든 정책 집행을 손쉽게 예비비로 먼저 하고 국회에는 나중에 보고하면 될 것이다. 정부도 국정교과서 편찬 작업에 예비비를 사용하는 명분을 대기가 궁색했는지,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국회 답변에서 “교과서 편찬은 예측하지 못한 사안이었다. 또 제작에 15개월이 걸린다는 점에서 11월엔 (편찬에) 착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부총리 말대로라면 최근 들어 즉흥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했다는 건데, 백년대계라는 교육의 기초인 교과서 편찬을 이렇게 졸속으로 해도 되는 건지 한심스럽다. 또한 역사교과서처럼 사회적 토론과 의견 수렴이 필요한 사안을 굳이 시한을 정해놓고 편찬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시간을 갖고 추진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과서 편찬 작업을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긴급한 재난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정상적인 정부라면, 아무리 문제 있는 정책이라도 추진 과정만은 최소한의 절차와 정당성을 갖추려 노력해야 한다. 정문을 통과하는 게 쉽지 않다고 담을 넘어 들어가려는 건 도둑들이나 하는 짓이다. 국정교과서 추진에 드는 비용은 떳떳하게 교육 예산에 편성해서 국회의 심의를 받는 게 정도일 것이다. 물론 논란과 비판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이라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포기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