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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민주화 주역’의 서거와 이 땅의 민주주의

등록 2015-11-22 18:34수정 2015-11-23 15:31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시대의 풍운아였다. ‘와이에스’라는 별칭이 더 친근했던 그는 한국 정치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굵고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 정치 거목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줄기차게 싸운 불굴의 투사였고,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문민정부의 막을 연 주인공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과감한 변화와 개혁 조처들로 나라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출발점도 마련했다. 그는 또한 드라마틱한 정치적 변신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정치 인생의 제1막이 민주화 투사였다면 2막은 보수 정치세력의 구심점으로 극적인 방향 전환을 했다. 그의 이런 변신은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영욕의 한국 정치사를 이끌어온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양김 시대’라는 말로 표현되던 한 시대가 완전히 역사의 갈피 속으로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인이 남긴 어록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길이 남을 명언은 아마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일 것이다.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 막바지에 고인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뒤 외쳤던 이 말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그의 국회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됐고, 이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종말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 시절 목숨을 건 23일간의 초인적인 단식투쟁 역시 바위같이 단단하게만 여겨졌던 독재정권에 균열을 일으키게 하는 기폭제였다. 지금 이때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인의 이런 노력도 헛되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없이 뒷걸음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새벽’이 왔다는 생각은 순간의 착각이었을 뿐 지금도 ‘닭의 목을 비트는’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일궈낸 주역의 죽음 앞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개혁조처들

대통령 재임 시절 그가 전광석화처럼 펼친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실시 등 잇따른 개혁 조처들은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훌륭한 업적이다. 이런 조처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비로소 군부 재등장의 악몽에서 벗어났고, 검은돈 차단과 경제의 투명성, 공직사회의 윤리적 책무 등의 단어에 눈을 돌리게 됐다. 고인의 개혁 조처들은 방향의 올바름뿐 아니라 개혁의 타이밍, 사전 준비의 치밀함, 밀어붙이는 뚝심 등 방법론 면에서도 뒤를 이은 정권들이 본받을 만한 귀감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 조처를 보면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내용적으로는 개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대역행적이고, 방법론 역시 고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딱한 생각이 든다.

고인의 정치 역정에는 빛만이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무엇보다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과 더불어 우리 정치를 지역주의의 늪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 실패는 민주세력의 분열은 물론 지역갈등을 고착화하는 결정적 갈림길이었다. 여기에 더해 고인은 3당 합당을 통해 지역주의를 돌이킬 수 없는 한국 정치의 상수로 만들어버렸다. 그 폐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부마항쟁으로 한때 ‘민주화의 성지’라고 칭송받던 지역은 이제는 보수 정치 세력의 텃밭이 되고 말았다. 고인이 만들어버린 한국 정치 지형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두고두고 한국 정치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 나라를 외환위기에 빠지게 한 잘못 등은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3당 합당으로 정치역정에 흠

그의 정치적 변신이 남긴 슬픈 유산은 그의 ‘정치적 제자들’의 정치 행로에서 극명히 확인된다. 과연 이들이 한때 민주화 투사인 고인과 함께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맞는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그는 고인이 서거하자마자 곧바로 빈소를 찾아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루신 정치지도자”라고 애도하며, 자신을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반민주적 행태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각종 색깔몰이 등으로 민주주의 퇴행에 앞장서고 있는 그를 보면 과연 와이에스의 정치적 아들이라는 말을 그토록 쉽게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제 파란만장했던 정치 역정을 뒤로하고 영원히 역사의 저편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은 이 땅의 정치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몰려들어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고 생전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말만의 애도, 시늉만의 추모가 돼서는 안 된다. 빛나는 유산은 더욱 계승발전해 빛을 더하게 하고, ‘마이너스 유산’은 올바르게 바로잡는 것은 이 시대 정치인 모두의 책임이다. 고인의 명복을 충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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