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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시위대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위험한 인식

등록 2015-11-25 18:38

몇 년 전 상영된 <브이 포 벤데타>란 영화엔 미래사회의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주인공이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영국의 실존인물 가이 포크스를 본뜬 이 가면은 그 뒤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르며 전세계 수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 등장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그 가면도 ‘테러범의 상징’으로 간주돼 수사 대상에 오를 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국무회의에서 “복면시위는 못하게 해야 한다. 이슬람국가(IS)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얼굴을 감추고…”라고 지시했으니 말이다.

박 대통령 주장대로, 복면을 쓴 시위대가 폭력행위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시위대를 테러범으로 몰면서 과도하게 재갈을 물리려는 건 전형적인 독재 시절의 수법이다. 1970년대 유신 시절 ‘국가안보 또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일시 정지했던’ 긴급조치의 발상과 다르지 않다. 긴급조치에 대해선 ‘최소한의 법적 토대도 갖추지 못한 과도한 국가폭력’이란 공적인 평가가 이미 내려졌다. 요즘 박 대통령이 흥분해서 토해놓는 발언들이 얼마 뒤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란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

국제적으로도 박 대통령 발언은 얼마나 큰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지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알아야 한다. 전세계 수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 정치적 의사표시의 하나로 가면을 쓰거나 얼굴에 색칠을 한 시민들이 참여하는데, 대통령 인식대로라면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로 처벌돼야 마땅할 것이다. 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슬람국가(IS)를 해킹했던 국제해킹단체 ‘어노니머스’는 테러 방조 단체쯤으로 취급돼야 한다. 진짜 국격을 떨어뜨리고 대한민국의 위신을 손상하는 건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판단과 행동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앞으로 검찰·경찰과 국정원 등이 ‘법치’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국민 기본권을 제약하며 공안몰이에 나설까 하는 점이다. 사실 중요한 건 복면이 아니다. 수많은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외치는 게 무엇인지, 그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갈 조짐을 보인다. 대통령 말 한마디면 진보정당에 ‘위헌’ 딱지를 붙이고 시대를 거스르는 국정 교과서 발행을 추진하는 나라에서 시민사회단체와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폭력적 탄압과 대응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영화에서 가면을 쓴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 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지금 박 대통령은 국민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길 권한다. 아무리 정치적 반대파라 해도 국민 일부를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한 발언은 취소해야 마땅하다. 그게 민주적 절차를 통해 뽑힌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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