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 역사 정의를 세우려 한 사람들은 분노하고 문제를 덮으려고 한 이들은 웃는다. 한국과 일본 정부의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최종 해결’ 선언 이후 모습이다. 1965년 한-일 협정에 비견되는 굴욕외교지만 정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은 위안부 문제가 제기될 때부터 해법의 핵심이었다. 정부는 이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렸다. 정부는 아베 신조 총리가 처음으로 ‘책임’을 인정했다고 자화자찬하지만 일본 쪽은 바로 ‘법적 책임’이 아님을 재확인했다. 단순한 책임과 법적 책임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법적 책임을 진다는 건 과거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필요한 후속 조처를 취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심판, 사실에 근거한 명확한 사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 관련 자료 공개, 교과서 기술과 추모사업을 비롯한 재발방지책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번 합의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일본은 우리 정부가 만들 위안부 관련 재단에 10억엔(97억원)의 돈만 내면 된다. 이 또한 배상금이 아니라 지원금이다. 정부가 일본의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파는 격이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선언은 더 기가 막힌다. 스스로 알아서 입을 틀어막은 꼴이다. 중요한 역사적 범죄에는 마침표가 있을 수 없다. 독일이 홀로코스트 문제에 대한 국제협약에 서명하고 이행에 나선 지 오래지만 지금도 꾸준히 사과하고 필요하면 새 조처를 취한다. ‘피해자가 만족할 때까지 머리를 숙인다’는 게 원칙이다. 위안부 문제 최종 해결 선언은 한-일 협정에서 식민지배 관련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한 것의 복사판이다. 이 협정은 징용 피해자 배상 등의 문제에서 두고두고 족쇄가 되고 있다. 이제 오히려 일본에서 ‘앞으로 한국 쪽이 딴소리를 안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가해자가 거꾸로 목소리를 높이도록 만든 게 이번 합의다.
정부가 서울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소녀상의 이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것은 일본 쪽에 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태다. 시민권을 침해하는 월권이기도 하다. 위안부소녀상은 이미 세계 곳곳에 수십개가 있다. 아픈 역사를 성찰하는 지구촌 양심의 상징이 됐다. 정부의 약속은 이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역사적 성격을 갖는다.
합의 발표 이후 일본과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노골적으로 주문한다. 미국 쪽은 중국을 겨냥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 더 힘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이번 합의의 배경에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입했으며 대부분 미국산이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안보협력 구도에 끌려가면서 위안부 문제 등 중요한 역사적 사안에서 명분을 잃고 재정적·정치적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가장 보수적이라는 아베 신조 정부를 상대로 현실적인 해법을 이끌어냈다고 강변한다.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공보다 과가 훨씬 크다. 정부는 이번 합의를 무효화하고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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