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재계가 손잡고 벌이는 이른바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 서명운동’은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응축해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이 길거리 서명에 동참한 뒤 황교안 국무총리에 이어 장관들과 기업들이 서명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권력의 뜻을 살펴 재빨리 줄서기를 하는 광경이 참으로 가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명운동이 국민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서명운동은 시작부터 권력과 자본의 ‘짜고 치기’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경제활성화법의 국회 통과 지연을 비판하면서 “국민이 앞장서 나서달라”고 말하자마자 경제단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대한상공회의소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중소기업중앙회 등 32개 경제단체와 업종별 협회에 공문을 보내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촉구했다. 서명인원 일일현황을 취합해 보내줄 것과 현수막을 만들어 회관에 부착할 것도 요청했다. 사실상 서명운동 총동원령을 내려놓고도 마치 일반국민의 자발적인 서명운동인 양 둔갑시켰으니 이는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이다.
청와대와 재벌은 이 땅의 강자들이다. 막강한 권력과 금력, 다양한 정책적 수단, 국회 다수당의 보필, 보수언론의 전폭적인 지원 등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에 걸맞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 게 온당하다. 그런데 고작 하는 행동이 서로 손잡고 길거리에서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역겹다.
게다가 재계는 엄밀히 말해 경제활성화 법안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노동자들에게 이 법안은 손쉬운 해고 등에 대한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해당사자인 재계가 ‘국민’이라는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온 것도 부적절하기 짝이 없지만, 일반 직원들을 상대로 ‘손쉬운 해고 법안에 서명하라’고 강요하는 현실은 더욱 역설적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수혜자들이 피해자들을 상대로 서명을 강요해서 여론몰이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재벌이 합작해 벌이는 얄팍한 꼼수가 드러난 이상 서명운동은 이미 빛을 잃었다. 그런 식의 강제 캠페인을 벌여서 서명인원이 1000만명에 이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박 대통령이 서명에 동참한 뒤 여야의 법안 절충 작업이 꼬이면서 서명운동은 오히려 법안 통과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청와대와 재계가 서명운동을 계속한다면 실제 목적은 딴 데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고 ‘국회 심판론’을 확산시키려는 정치적 노림수가 어른거리는 것이다. 청와대와 재계는 시대착오적인 관제 서명운동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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