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일이 현실화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참여로 ‘관제 운동’이란 비판을 받는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서명운동’에 행정기관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겨레> 취재 결과, 경북 김천·문경·영주시에서 읍·면·동사무소를 통해 서명운동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으며 통반장이 주민들을 방문해 서명을 받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관권 운동’이 된 것이다.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해괴하고 창피한 일이다.
정부·여당이 신경망처럼 퍼져 있는 말단 행정기관과 통반장 등을 동원해 여론을 왜곡·조작하는 ‘관권 운동’은 군사독재 시절에 흔히 써먹던 수법이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1965년 한일협정 찬성 서명운동이다. 굴욕적인 협정에 비난이 들끓자 박정희 정권은 반대 여론을 탄압하는 한편 관권 서명운동을 벌였다. 통반장이 가가호호 찾아가고 집권당 당원들이 관공서 등을 돌아다니며 강제로 서명을 받았다.
이처럼 집권세력이 그 권력을 이용해 대중을 동원하는 건 전체주의 체제의 특징이다. 겉으로는 서명운동 등 자발적인 형태를 띠더라도 무언의 압력과 같은 강압적 분위기가 더해지면 민주주의는 질식하고 만다. 국민에게 특정 의견을 표현하도록 강제하고 반대되는 의견은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체제는 곧 독재요 파시즘이다. 여기에 관제·관권 운동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대중 동원 체제는 부정선거에 악용되기도 했다.
이번에 드러난 관권 서명운동은 일부 지자체에 국한된데다 상부의 지시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에서라도 이런 어이없는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의 약화를 보여주는 위험 신호다. 대통령부터 본분을 벗어나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범’을 보이니 너도나도 따라 하는 것이다. 해당 지자체들은 서명운동을 당장 그만둬야 하고 정부도 엄중한 경고 메시지를 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권 차원에서 또 다른 일탈을 조장하는 셈이 된다.
과거에는 관권 운동이 국민에게 두려움을 주고 실제 정국에 영향을 끼쳤을지 몰라도 이제는 두려움 대신 비웃음만 살 뿐이다. 정부가 개입한 서명운동에 천만명이 참여한들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웃음이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퍼져간다는 점이다. 나라 망신도 이쯤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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