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가 최근 정부 지원을 받는 산하단체들에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천만 서명운동’ 동참을 독려하는 공문을 내려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보훈처는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14곳에 “관내 보훈단체의 참여 실적을 확인하려 하니 (각 단체는) 지부장 또는 지회장 주관으로 서명운동에 참여하도록 전파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논란 많은 재계의 서명운동을 정부 부처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돕고 나서는 게 말이 되는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이는 서명운동이 입법 촉구를 위한 순수한 민간 운동이라는 재계 주장과 달리,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관제 운동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걸 뚜렷하게 보여준다. ‘업무 협조’라는 외피를 쓰긴 하지만 정부 재정지원을 받는 단체들이 보훈처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상이군경회와 고엽제전우회 등은 최근 잇따라 서명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보훈처의 일탈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 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할 때부터 익히 예상됐던 일이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하는 현 정권 아래서 대통령이 서명을 했으니 그 밑의 정부 부처나 기관, 단체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다. 황교안 국무총리와 부처 장관들이 서명에 동참했고, 끝내 보훈처처럼 아예 서명운동을 주도하는 정부기관까지 출현한 것이다. 그러니 정부 부처가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서명에 적극 개입하는 ‘관제 운동’의 궁극적 책임은 박 대통령에게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보훈처를 이끄는 박승춘씨는 얼마 전 아들의 취업을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청탁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고위 공직자로선 있어서는 안 될 ‘도덕적 해이’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제 관제 서명을 주도한 사실까지 드러났으니 더이상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될 것이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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