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그램의 단물이 모두 빠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때, <프로듀스101>이 나타났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드물다고 할 정도로, 한 번 보게 되면 응원하는 연습생이 생기고,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다시 시청하게 된다고 한다. 국내 46개 기획사의 101명의 여자 연습생들이 유닛 걸그룹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연습하고 잔인하게 방출된다.
얼마 전, 해당 방송사와 출연자인 연습생들 사이의 계약서가 유출되었다. 계약서에는 출연료 0원, 악마의 편집에 대한 민·형사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불공정한 조항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101명의 소녀들은 프로그램의 출연 자체를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고, 치열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스타가 되기 위해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지인으로부터 방송에 출연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경험이고 출연료 그 이상이다, 성공 가능성이 출연료 이상의 가치라는 말을 들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동의했고, 연예인 걱정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란 소리도 들었다.
걸그룹이 되기 위해 연습생의 설움과 부조리, 불공정한 계약들을 참아내는 그녀들을 보면서 ‘수습’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101명의 소녀들은 걸그룹 인턴, 걸그룹 수습인 셈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처음부터 정규직으로 임용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젊은이들은 인턴 혹은 수습이란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전문직으로 불리며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변호사, 세무사, 노무사 등도 예외는 없다. 이들도 합격 이후 ‘소속사’를 갖게 되면 <프로듀스101>의 그녀들과 다를 바 없이 열정을 바쳐야 한다.
뉴스에서는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 시급을 받는 전문직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습 사용 중에 있는 자 등에 대한 최저임금액을 규정하고 있는 최저임금법 시행령 3조에 따라 수습기간에 최저임금액의 90%를 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건 법을 기막히게 잘 지킨다.) 아니 ‘소속사’의 배려로 최저임금액을 받더라도, 수습 변호사와 수습 기자는 물론 병원의 인턴, 레지던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야간근로와 휴일근로이다. 근로기준법 제53조가 규정하는 연장 근로의 제한, 제56조가 규정하는 연장, 야간 및 휴일근로 등에 관한 수당은 이들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우리 때는 더 열악했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선배들의 이야기, 타사도 그렇게 한다는 바닥의 전통, 어렵사리 합격했는데 처음부터 미운털 박히고 싶지 않은 심정, 돈을 주고도 못 배우는 걸 일하면서 배우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고 그 정도 ‘노오력’도 하지 않느냐는 기성세대의 인식 앞에서 이들은 절망한다.
성공 가능성이란 달콤한 유혹 앞에서 연습생들은 불공정한 계약들도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전통과 ‘노오력’을 앞세우는 같은 바닥의 선배들은 놀랍도록 냉정하다. 그 냉정함 앞에서 수습들은 열정으로 버틸 뿐이다. 연습생이라도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티브이에 나온 연습생들을 선망하고, 수험생과 취준생들은 수습들을 동경한다. 소위 사회에서 알아주는 직업들이 이러할진대, 그렇지 않은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현장과 노동은 어떠할까 다시금 생각해본다.
여성국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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