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였다. 불공정한 공천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서울과 대구 5곳의 공천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5일 이 중 ‘진박’(진실한 친박) 후보가 출마한 대구 2곳의 공천을 의결했다. 청와대와 친박 세력의 공천 전횡에 반기를 드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타협을 해버린 것이다. 비겁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다. 집권여당 대표가 국민을 속이고 우롱해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구 동구을 등 5곳에 새누리당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바로 김무성 대표 자신이다. “잘못된 공천을 바로잡아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공천 과정 내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후보등록 시점에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는 김 대표를 보며, 많은 국민이 ‘뜬금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한 줌의 양식은 있나 보다’라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어도 30시간을 채 버티지 못한다는 세간의 비웃음을 이번엔 좀 깨는 거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대구 동갑과 대구 달성에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추경호 전 국무조정실장이 공천장을 받았다. 진박 핵심들은 모두 구제해준 셈이다. 끝까지 무공천 지역으로 남긴 나머지 3곳은 사실 새누리당 후보를 내더라도 이기기 쉽지 않은 곳이다. 현역인 유승민 의원(대구 동구을)과 이재오 의원(서울 은평을)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전직 구청장(김영순·서울 송파을)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지역이다. 결국 김 대표는 ‘무공천 선언 소동’을 통해 무소속 후보 3명을 사실상의 여당 후보로 선거를 치르게 해준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자’라 낙인찍은 유승민 의원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했으니 김 대표가 나름 실속을 챙겼다고 당내에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보기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대선 주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어찌 이리 비겁할 수 있을까. 아무리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이라 해도 집권여당 대표가 이런 식으로 당원과 국민을 속이고 정치를 희화화시킨 적은 없다.
이제 대구 동구을에선 탈당한 유승민 의원이 사실상 당선을 예약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 보복에 맞서 국민 심판을 받겠다던 유승민 의원의 의지는 허무하게 제거돼 버렸다. 선거란 게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 심판의 장인데, 그런 심판의 기회를 아예 없애버렸다. 그렇다고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가 김 대표를 용서할 리는 없다.
김무성 대표와 새누리당의 잔꾀를 심판하는 건 국민 손에 맡겨졌다. 새누리당이 잘못된 공천을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국민을 속이려 한다면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최소한의 신뢰조차 상실한 정당엔 그에 합당한 정치적 심판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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