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난 다음날인 14일 청와대가 내놓은 반응은 “제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 국민들의 이런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대변인의 말 한마디가 고작이었다. 선거 패배 뒤에 상투적으로 나오는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조차 없었다. 이번 총선 결과가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 전횡과 무능에 대한 국민의 냉엄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아마도 지금 책상을 내리치고 한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분을 삭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에서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국정운영을 하기도 어려워졌고, 조기 레임덕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그 울분과 분노가 어떨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야당에 표를 몰아준 유권자를 탓하고, 선거운동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새누리당 사람들을 탓하고, 의석수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참모진을 탓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대통령의 비극이자 나라의 비극이다. 박 대통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국정 장악력을 상실한 현실을 인정하고 국정운영 방식, 국회와의 관계, 당청관계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궤도를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남 탓이나 하면서 ‘나의 길을 가련다’고 한다면 대통령 자신은 물론 나라가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당장 새누리당은 김무성 대표의 사임 등으로 일대 혼란에 빠지면서 새로운 당청관계의 정립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진실한 사람’이니 ‘진박 후보’니 하는 말을 떠들다가 당 지도부가 무너지는 상황에 부닥쳤는데도 박 대통령이 여전히 수직적인 당청관계를 고집하면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여권의 차기 주자들이 대부분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당권이나 차기 대선 주자 선정에 관여하려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내리막길에 접어든 대통령이 ‘내 손으로 다음 대선 후보를 낙점해 정권 재창출을 하겠다’는 유혹에 빠져들수록 레임덕의 속도만 더욱 빨라지게 돼 있다.
박 대통령이 민심 수습에 뜻이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인사쇄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간신배들을 물리치는 일이다. 현기환 정무수석 등이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고 하지만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국정운영의 고비마다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며 맞장구나 치기 바쁜 ‘예스맨’들만 잔뜩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 쇄신은 영영 이뤄질 수 없다.
권력이든 산이든 내려오는 길이 더 위험한 법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이미 추락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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