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을 앞두고 야당이 보였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는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었다. 무려 9일 동안 계속된 토론 기간에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의원이 20여명이나 참가해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낱낱이 짚었다. 시민들의 참여와 호응도 유례없이 뜨거웠다. 하지만 이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러방지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테러방지법이 실제 시행에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인권침해의 위험성은 애초의 우려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테러방지법 시행령을 보면, 중앙 및 지역 테러대책본부장의 요청에 따라 군 대테러 특공대 등을 민간시설에 투입할 수 있도록 했다. 국가정보원 지부장이 지역 테러대책협의회 의장을 맡도록 하는 내용도 넣었다.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국정원에 넘겨줌으로써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민주주의·인권 위협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내용투성이다.
국무조정실은 18일 군 병력 민간 투입, 대테러 인권보호관의 권한 부족 등의 독소조항에 대해 “국방부 소속 대테러특공대 투입은 일반적인 군 투입과 성격이 다르다”느니 “대테러 인권보호관이 충분한 인권보호 활동을 수행하도록 규정했다”고 변명하고 나섰으나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다. 대테러특공대 문제만 해도 계엄에 의하지 않고 국정원 뜻만으로도 군 병력 투입이 가능하다는 본질적인 내용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유일한 견제장치라는 인권보호관의 권한도 고작 자문과 권고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제 테러방지법 문제는 단지 시행령 글자 몇 개를 고쳐서 해결될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법을 아예 다시 없애거나 최소한 독소조항 등 법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실제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면서 “총선에서 야당이 국회를 지배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하면 테러방지법의 인권 유린 가능성을 제거하는 수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말했고, 국민의당 역시 똑같은 약속을 했다. 이제 그 약속을 실천할 시점이 왔다.
4·13 총선으로 정립된 3당 구조는 국회 운영과 여야 관계에서 새로운 협력과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정치권의 대화와 타협의 중요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원칙 없는 타협, 적당한 물타기식 국회 운영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어설픈 행보는 총선 민심의 역행이자 유권자에 대한 배신행위일 뿐이다. 시민들이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보내준 뜨거운 성원과 호응을 떠올려봐도 테러방지법의 폐기 또는 수정은 야당 앞에 놓인 엄중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벌써부터 보수 언론 등에서는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국민의당을 향해 선명성 경쟁을 벌이지 말라느니, 합리적 제3의 길을 가라느니 하는 주문을 내놓고 있다. 테러방지법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기존의 정부 방침에 반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안은 몰라도 인권침해의 독소조항으로 가득 찬 테러방지법에 관한 한 국민의당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야권이 기존의 약속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믿는다. 두 야당이 3당 구조 속 정책적 협력의 첫걸음을 테러방지법의 대대적인 손질로 시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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