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윤면식 한은 부총재보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국책은행에 자본금 확충이 필요하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활용해서 재정의 역할을 하려면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책은행의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명분으로 ‘한국판 양적완화’를 추진하려는 데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뜻을 표명한 것이다.
앞서 박 대통령은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한국판 양적완화와 관련해 “한번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어 28일 국무회의에선 “기업 구조조정을 차질없이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구조조정을 집도하는 국책은행의 지원 여력을 선제적으로 확충해 놓을 필요가 있다.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연일 직접 나서서 한은을 압박한 것이다.
‘한국판’ 또는 ‘선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양적완화의 본질은 돈을 새로 찍어내 푸는 것이다. 그 영향이 국민경제 전체에 미친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양적완화는 기준금리를 더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고, 이마저도 그 효과가 의문시된다. 반면 구조조정 용도로 돈을 찍어내게 하는 것은 특정 기업의 부실 책임을 국민 모두의 부담으로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기업 부실의 원인은 대주주와 경영진의 잘못, 정부와 국책은행의 무능 탓이다. 따라서 재원 마련도 대주주의 사재 출연과 정부의 재정 투입이 우선돼야 한다. 돈을 찍어내 편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을 텐데 한은의 발권력에 기대려 하는 것은 손쉽게 가보겠다는 의도다. 재정 투입을 위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거나 국채를 발행하면 국회 논의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고 정책 실패가 드러나게 된다. 정부로선 피하고 싶은 일일 게다. 반면 양적완화는 금융통화위원회 결정만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여전히 한은을 관치금융 시절의 ‘재무부 남대문출장소’쯤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한은은 이번처럼 정부나 정치권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 분명히 반대해야 한다. 그게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고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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