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문제가 공식 거론된 것은 이제까지 딱 두 번이다. 한 번은 2011년 12월 위안부 문제로 파탄 난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 간의 교토 정상회담 때이고, 또 한 번이 8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개최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 사이의 이번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두 회담에서 소녀상 문제가 제기된 방식이나 처지는 전혀 딴판이다.
교토 회담에서는 이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쪽의 적극적인 조처를 요구한 데 대해 노다 총리가 수세적인 반발 차원에서 주한 대사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 철거 얘기를 불쑥 꺼낸 것이지만, 이번 비엔티안 정상회담에서는 아베 총리가 먼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소녀상 철거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쪽으로선 지난해 12월28일 위안부 합의에 따른 10억엔 지출을 완료했으니, 한국 정부도 소녀상 문제를 포함하여 합의의 확실한 이행 노력을 해달라는 것이 요지다. 이에 대해 청와대 쪽은 “아베 총리의 발언을 확인해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 대통령은 소녀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쪽이, 박 대통령이 회담에서 ‘합의의 성실한 이행’을 언급한 것을 두고 “당연히 총리가 지적한 소녀상에 대한 것을 포함해 이런 답변을 받았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 마당에, 청와대의 위와 같은 설명은 얼마나 옹색한가. 청와대의 설명에서 적어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소녀상 문제 제기에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니 10억엔과 소녀상 철거를 맞바꾸는 밀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줄기인 위안부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곁가지인 소녀상 문제가 전면으로 등장한 이런 ‘전도된 장면'은 분명한 법적 책임 추궁이라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채 불완전하고 잘못된 방식으로 정치 타협을 한 데서 비롯한 굴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반도 주변의 안보 상황을 무시한 채 정치적 타협을 서둘러 하지 않으면 안 되게 위안부 문제를 다뤄온 대일정책이 가져온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일본 쪽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인 것처럼 10억엔 지출 완료에 따른 이른바 ‘도덕적 우위'의 입장에서 소녀상 철거 요구를 끈질기게 해올 것이다. 이런 굴욕을 계속 겪지 않으려면 안타깝지만 위안부 문제의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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