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계열사들이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에 8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낸 내역을 보면 기시감이 든다. 30여년 전 전두환 정권이 아웅산 테러 피해자 및 유족을 위한다며 기업들한테 900억원을 걷어 일해재단을 설립하던 때와 매우 비슷하다. 이번에도 재벌들이 자산규모에 맞춰 액수를 사전에 정한 흔적이 역력하다. 두 재단에 삼성이 가장 많은 204억원을 냈고, 에스케이가 111억원, 현대차가 82억원, 엘지가 78억원을 냈다.
재단 설립 경위에 대한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의 해명은 황당하다. 기업들이 지난해 여름부터 논의를 시작해 자발적으로 두 재단을 설립했다고 했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에게는 출연 규모나 방법이 결정된 시점에 알려줬을 뿐 사전 지시를 받은 바 없다고도 했다. 이런 말을 과연 누가 믿겠는가. 미르재단에 돈을 낸 기업들은 상당수가 지난해 10월26일에 몰아서 냈다. 케이스포츠재단에는 12월31일에 대부분 냈다. 빠듯하게 잡힌 출연금 납부 기한을 잘 지킨 모양새다. 재단 설립은 몇 달 사이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그 힘센 재벌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할 큰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업들은 큰돈을 내놓고도 재단 운영에 참여하기는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재계의 한 인사는 “정권 차원에서 이뤄진 일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입이 없다”고 <한겨레>에 털어놓았다. 사회공헌 차원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에 주주의 돈을 함부로 쓰고 이렇게 해명하는 것은 사실상 배임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재계를 대표한다는 전경련의 퇴행은 더 심하다. 전경련은 이번 일에 앞서, 돈을 주고 탈북자들을 시위에 동원한 ‘어버이연합’에 돈을 댄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전경련 산하단체인 자유기업원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나팔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재계의 기금 출연을 이해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정부 들어 씨제이(CJ) 비자금 수사를 시작으로, 효성, 포스코, 롯데 등 재계에 대한 검찰 수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에서 재벌 기업들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떳떳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에 이름난 대기업들이 어떻게 외국에 나가 얼굴을 들려는 것인가. 전경련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 진실을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번 일로 인한 타격이 그나마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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