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또다시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19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과정에서 북한의 의견을 구했다는 ‘송민순 회고록’에 대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근거는 없다”면서도 이런 답변을 했다. 한 나라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저열하고 노골적인 정치개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원장한테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진위를 묻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이 원장은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문제를 논의한 2007년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이 문제에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자격 자체가 없는 셈이다. 설사 국정원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도 당시 회의 참석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원장은 “자료를 본 것은 없다”고까지 말했다. 따라서 여당 의원들이 유도성 질문을 한다고 해도 이 원장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했어야 옳다.
그가 “회고록이 진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 대목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국정원의 정보분석은 구체적 사실관계와 정밀한 추론에 근거해야 하며 ‘느낌’에 의존한 업무 처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정보를 다루지 않는 사람도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명색이 국정원장이라는 사람이 “느낌이 그렇다”느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렇다”느니 하는 말을 태연히 했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새누리당이 불붙인 ‘종북몰이’에 가세해 유력한 야당 대선 후보에게 흠집을 내고, 각종 비리로 궁지에 몰린 청와대를 측면지원하기 위해서다.
이 원장은 2015년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안보를 무너뜨리는 역사적 범죄”라며 자신은 결코 역사적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약속이었다. 벌써 이렇게 노골적인 정치개입을 하고 나선 것을 보면 앞으로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이 얼마나 더 ‘농간’을 부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대선 때의 댓글 공작은 저리 가라 할 음험한 정치개입이 자행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번 국회 발언에 대한 명백한 사과와 정치 불개입 약속이 없는 한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정원장 직무를 더는 수행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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