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티피피)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티피피는 미국과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이 참여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 그는 이날 티피피 탈퇴 계획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재협상 방침을 공식화한 지 하루 만이다. 그가 대선 과정에서 줄곧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워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속도가 매우 빠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티피피 탈퇴 행정명령 서명 뒤 무역대표부에 내려보낸 ‘대통령 메모’에서 “미국의 산업을 증진하고 미국 노동자를 보호하며 미국의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양자 무역협상을 추진할 것을 지시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을 둔 양자 무역협정을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앞서 20일 취임사에서도 “수십년간 우리는 미국 산업을 희생한 대가로 외국 산업의 배를 불렸다. 나의 단순한 두가지 원칙은 미국산 제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양자 무역협상 전략은 상대국에 대한 공세적인 요구로 구체화할 가능성이 크다. 양자 협상은 다자 협상보다 힘의 우위를 내세워 국익을 관철하기 쉬운 구도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티피피 탈퇴가 당장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애초 티피피에 참여하지 않은 까닭에, 오히려 티피피 출범으로 예상됐던 불이익을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트럼프발 보호무역주의가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자유무역의 혜택을 많이 받아온 한국 경제는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됐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미국 수출 비중이 큰 국가들이 모두 영향권에 들겠지만, 우리는 내수 시장이 취약한 탓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미국이 꺼내들 카드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요구, 환율 조작국 지정, 반덤핑 조사 확대 등이 예상되는데, 모두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이 만만찮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경제에 대한 견제에 나서 양국 간에 경제 전쟁이 본격화하면 한국은 ‘새우등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정부의 대응을 보면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유일호 부총리는 지난 20일 기자들과 만나 “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자가 통상에 관해 후보 때 한 발언과 다를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민간기업들이 힘을 합쳐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마련해 보호무역주의 파고에 맞서야 할 때다. 중국, 일본과 함께 미국의 통상 압력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또 국제 무역질서 재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정부 들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국실급으로 격하된 통상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계획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문건을 들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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