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5일 관훈 토론회에 참석해 “개헌을 통해 정치 질서를 교체하겠다”고 밝혔다. 설 연휴를 코앞에 둔 이번 토론은, 반 전 총장이 귀국 이후 한 첫번째 장시간 질의응답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국민이 궁금해하는 정치 노선과 정책 방향, 곧 그가 대통령이 되면 어떤 나라를 만들려는지에 대해선 분명한 그림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지율 추락의 원인이 정치 경험의 부족이 아니라 ‘정치 비전의 부재’임을 깨닫지 못하면 반 전 총장의 미래는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반 전 총장은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또 하나의 불행한 대통령을 만들 뿐”이라며 ‘대선 전 개헌’을 새로 제기했다. 개헌을 통한 권력 분산이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제왕적 대통령의 비극’을 막는 하나의 방안일 수는 있다. 하지만 개헌은 방편일 뿐, 개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국민은 그가 최순실 사건으로 무너진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우려는 것인지, 어떤 정책과 노선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지 알고 싶어한다. 재벌 개혁이나 검찰 개혁, 일자리와 비정규직 문제 등 당면 현안에 대한 생각과 해법을 듣고 싶어한다. 반 전 총장은 여전히 뚜렷한 노선과 비전을 내놓지 못했다. 이래선 진보, 보수 어느 쪽의 신뢰도 받기 어렵다.
토론회 당일 공개된 <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 반 전 총장 지지율(16%)은 더 떨어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31.2%)에 두 배 차이로 뒤졌다. 양자 대결에선 문 전 대표뿐 아니라 이재명 성남시장, 안희정 충남지사에게도 큰 폭으로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심의 용광로인 설 연휴 직후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반 전 총장이 과연 대선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을지 근본적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물론 ‘개헌 문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조기 대선이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두세달 안에 헌법을 고치고 대선을 치르는 게 과연 가능하고 현실적인지는 의문이다. 반 전 총장이 뒤늦게 ‘대선 전 개헌’을 제기한 건, 이걸 통해 개헌 세력을 하나로 모아 ‘빅텐트’를 치겠다는 정치 전술의 일환일 것이다. 노선과 비전은 내놓지 않고 정치적 노림수만으로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게 ‘정치 교체’인지 묻고 싶다. 반 전 총장은 자신의 미래를 심사숙고해야 할 중대한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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