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 의혹을 조사해온 진상조사위원회가 법원행정처의 조처를 ‘사법행정권 남용’이라고 못박았다. 법관의 독립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연구회가 지난해 12월 연세대 법학연구원과 함께 법관인사제도 등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기로 한 뒤부터 행정처는 주례회의를 통해 대책을 논의하는 등 대회 연기·축소를 직간접으로 압박했다고 한다. 사표 소동까지 벌어졌던 이아무개 판사 인사 의혹도 행정처가 학술대회에 부당하게 개입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으로, 그 책임 역시 행정처에 있다고 확인된 것은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결국 그동안 사표 소동에 대해 “이 판사 개인적 사정”이라며 언론 보도를 부인해온 행정처의 주장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난 셈이다.
조사위는 컴퓨터 확인도 않은 채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결론짓는 등 조사의 한계도 뚜렷하다. 그럼에도 행정처의 책임을 명시한 이상 추가적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불가피하다. 행정처 차원에서 회의를 열고 대응 문건까지 만들었다면 이 판사와 접촉했다는 이아무개 양형위 상임위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사안이 아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역점 사업인 상고법원을 반대하고 ‘제왕적 대법원장’을 비판해온 연구회 내 ‘인사모’(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를 겨냥해, 행정처가 윤리감사관실을 동원해 윤리강령 위반 여부까지 검토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러 정황을 보면 연구회에 대한 일련의 견제와 압박이 과연 대법원장이나 행정처장의 뜻과 무관하게 이뤄졌을지 의문이다.
블랙리스트가 없다면 왜 파일을 삭제해 ‘깡통 컴퓨터’를 만들었는지, 행정처는 왜 컴퓨터 조사를 거부했는지도 납득이 안 간다.
대법원은 진상규명과 처벌 등 후속 조처와 함께 이번 사건을 사법개혁 논의를 공론화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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