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을 불러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국정농단과 함께 정경유착이 본질이다. 재벌들이 권력의 협박에 못 이겨 일방적으로 돈을 뜯긴 게 아니라, 재벌들도 부패한 권력에 거액을 갖다 바친 대가로 각종 특혜를 챙긴 사실이 특검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그 결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기속돼 재판을 받고 있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불구속 기소됐다. 기소 단계까지 가지 않았지만 미르·케이스포츠재단에 거액을 건넨 다수의 재벌도 정경유착의 의혹을 말끔히 씻은 것은 아니다. 또 이 과정에서 창구 노릇을 한 전경련은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재벌 개혁을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꼽았다. 재벌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권이 바뀌어도 정경유착을 뿌리뽑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민 여론에 화답하듯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홍준표 자유한국당, 유승민 바른정당,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재벌 개혁과 관련해 많은 공약을 내놨다. 이들 공약은 크게 재벌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 재벌 경제력 집중 억제, 재벌 지배구조 개선 등 3가지다.
지난해 11월16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 앞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짜 주범 전경련 해체 및 삼성 규탄 대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불법행위 처벌 강화와 관련해 5명 후보 모두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확대 도입을 약속했다. 또 홍 후보를 제외한 4명은 대통령의 비리 기업인 사면권 제한과 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 개선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경제력 집중 억제와 관련해선 5명이 다 재벌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를 근절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갑질’을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안철수·심상정 후보는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을 약속했다. 반면 홍준표·유승민 후보는 상법 개정을 공약에서 제외했다. 지배구조 개선은 기업 자율에 맡기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재벌들이 황제경영 청산을 수없이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벌 개혁이 다수 후보들의 공통 공약이라고 해서 재벌 개혁을 낙관할 일이 전혀 아니다. 박근혜 정부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경제민주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박 전 대통령은 재벌과 보수언론이 반대하자 이를 헌신짝 버리듯 했다. 재벌 개혁은 실종됐고 그 자리를 정경유착이 차지했다.
이번에도 재벌과 보수언론은 재벌 개혁 공약을 ‘대기업 때리기’니 ‘포퓰리즘’이니 낙인찍으면서 딴지를 걸고 있다. 재벌 개혁은 정권 초반에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임기 중후반으로 가면 힘이 빠져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대선 뒤 바로 출범하는 새 정부가 재벌과 보수언론의 반발을 이겨내고 재벌 개혁을 이뤄내려면 무엇보다 강한 의지와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