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노제가 25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열려 상주가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운구차로 향하고 있다. 고인의 유해는 퇴촌성당에서의 마지막 미사 후 서울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된다. 광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23일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91) 할머니의 영결식이 오늘(25일) 오전 성남시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김 할머니의 시신은 서울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뒤 나눔의집 법당에 안치된다. 김 할머니의 빈소에는 이낙연 국무총리, 강경화 외교통상부 장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등 각계 인사는 물론, 김 할머니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던 이들, 그리고 김 할머니를 알지 못하는 일반시민 등 많은 이들이 찾아와 애도했다.
위안부 할머니 어느 누구라도 애끊는 아픔 없을까마는, 김군자 할머니의 삶은 일본에 의해 찢겨질대로 찢겨져 우리 모두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0살, 14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여의었다. 17살 때 강제로 납치돼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끌려갔다. 몇 번을 탈출하려다 붙잡혔고, 7번이나 자살을 시도했고, 일본군에 맞아 고막이 터져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중국 밭에서 배추를 뽑아 먹으며 38일을 홀로 걸어 고향에 돌아왔다. 3년 만에 옛 남자를 다시 만났으나, 남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못했고,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 사이에 낳은 딸은 생후 5개월 만에 숨졌다. 이후 할머니는 식모살이 등을 하며 평생 혼자 살았다.
1998년 나눔의집에 온 할머니는 기부를 통해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아름다운재단이 만들어질 때, 여기에 제일 먼저 기부한 사람이 김군자 할머니였다. 장례식 비용 500만원만 남긴 채 평생 모은 돈이라며 재단에 1억원을 기부했다. 이 돈은 보육원 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나눔의집이 위치한 퇴촌성당에도 장학금으로 1억5000만원을 기부했다. 자신의 전재산을 다 기부하고 난 김 할머니는 “수중에 40만원만 남았지만, (돈이 없어 공부를 못했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2007년 미국 하원 위안부 청문회에 나가 증언했다. “하루 평균 20명, 많게는 40명까지 일본군을 상대하는 지옥같은 생활을 했다.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까지 오게 됐다. 우리는 돈을 원하는 게 아니며 그들이 저지른 인권 유린과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라는 것”이라고 당당히 외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24일 “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이셨던 김군자 할머니, 이제 모든 고통 내려놓고 하늘에서 평안하십시오”라고 애도했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을 위해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법적 배상이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할머니가 저 하늘에서라도 한껏 웃으실 날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