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집행을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을 만들고 보조금을 차별적으로 집행한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하며 그 총괄 책임이 김 전 실장에게 있다는 점을 재판부가 인정한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세상 이치가 그르지 않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정치적 입맛에 따라 문화·예술인들을 옥죈 것은 창작활동 제약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대한 민주주의 유린 행위다. 공무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블랙리스트의 추악한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김 전 실장은 반성도, 자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스트 존재조차 몰랐다고 발뺌했고, 차별 지원 자체가 문제될 게 없는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강변했다. 재판부는 “그 어떤 명목으로도 포용되지 않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며 김 전 실장의 유죄를 인정했는데, 너무나 당연한 판결이다.
김 전 실장은 ‘왕실장’ ‘기춘대군’ 등으로 불리며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이다. 과거 유신헌법 초안 작성 작업을 주도했고 초원복집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 음습한 현대사의 고비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오죽했으면 법으로 도적질을 했다는 뜻의 ‘법비’,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나가 ‘법꾸라지’라고 불렸을까. 이번 판결은 그의 오랜 행적에 대한 상징적인 단죄 의미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정의당을 비롯해 정치권에선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든 국기문란 장본인들에게 내리는 단죄의 정도가 고작 최고 3년이냐”며 재판부의 형량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서 청와대의 부당한 지시를 그대로 수행한 조윤선 전 장관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데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이 많다.
또 블랙리스트 공범으로 기소돼 별도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재판부가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블랙리스트 공범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비친 대목도 선뜻 수긍하긴 어렵다. 박 전 대통령에게 블랙리스트 관련 보고를 직접 했다는 증언도 있는데, 이런 사실을 너무 경시한 판단이 아닌가 싶다. 박 전 대통령 재판 과정에서 이 부분은 더욱 철저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