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 해도 이런 수준일 줄은 몰랐다. 이명박 정권 시절의 국가정보원이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든 것도 모자라,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배우들의 알몸 합성사진까지 만들어 유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마디로 기가 막힌 일이다. 동네 양아치보다 못한 이런 조직을 국가정보기관이라 할 수 있는가.
2011년 국정원 심리전단이 만들어 배포했다는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의 알몸 합성사진은 저속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진보 성향 배우들을 모욕하고 망신 주겠다는 의도와 계획만큼은 노골적이고 치밀하다. 문씨는 ‘노사모’ 회원으로 활동했고, 김씨는 한진중공업·쌍용차 사태 등의 과정에서 ‘소셜테이너’로 주목받았다. 국정원은 침대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운 것처럼 사진을 조작해 ‘민간인 외곽팀’이 사용하던 아이디로 극우 성향의 한 인터넷카페 게시판에 올렸다고 한다. 사진엔 ‘공화국 인민배우 문성근·김여진 주연’ ‘육체관계’ 같은 문구가 달렸다.
이것은 국가기관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요, 비열한 범죄다. 김여진씨는 14일 트위터에 “지난 일이다 아무리 되뇌어도 지금이 괜찮지 않다”며 “그 추함의 끝이 어딘지 똑바로 눈뜨고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문성근씨는 “그냥 일베 안에서 그야말로 쓰레기들이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했지, 이걸 국정원에서 했을 거라곤 상상 못했다”고 했다. 심리전단은 합성사진 제작·유포 계획을 상부에 보고하며 ‘특수공작’이란 표현까지 썼다.
문씨와 김씨는 작가·배우·감독·방송인·가수 등 5개 분야 82명을 퇴출 대상으로 적시한 국정원의 ‘문화연예계 핵심 종북세력 명단’(블랙리스트)에 포함됐던 인물이다. 여기에 올랐던 윤도현·김미화씨는 <문화방송>(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배제됐고 김제동씨 소속사는 두번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이런 행태는 청와대 묵인을 넘어 지시에 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기획관리비서관 명의로 작성된 ‘좌편향 연예인들의 활동실태 파악’ 등의 문건이 나온 게 그걸 시사한다.
국정원 개혁발전위는 14일 원세훈 전 원장 등을 검찰에 수사의뢰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국정원 지휘부는 물론 청와대가 저열한 국내 공작에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