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혐의 등으로 국회의 탄핵을 받고 물러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출 증빙이 필요 없는 국가정보원의 특수활동비에서 거액을 가져다 쓴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기관 예산을 그렇게 사적으로 갖다 써도 된다는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통제하지 않고 재량껏 쓸 수 있게 놔두면 결국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생각하니, 권력의 속성이 본디 그런가 하는 씁쓸함을 거두기 어렵다. 이번 일을 거울삼아 국정원 예산도 국회가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정원은 비밀을 요구하는 일을 많이 한다. 따라서 기관의 활동이나 예산을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처럼 전혀 통제를 받지 않으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올해 5천억원 가까이 되는 국정원 예산은 전액이 특수활동비로 구성돼 있다. 기획재정부 회계에 잡혀 있는 예비비와 다른 정부기관 회계에 끼워져 있는 비밀활동비도 액수가 공식 예산에 버금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국정원은 예산을 요구할 때 세부 내역 없이 총액으로만 기록할 수 있어서, 기획재정부가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수가 없다. 특수활동비는 지출 증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국회법은 국정원 예산에 대해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면제해주고 있다. 오직 국회 정보위원회만이 비공개로 국정원 예산을 심사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국가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밀 사항에 대하여는 자료의 제출 또는 답변을 거부할 수 있다”는 국정원법에 따라 심의를 피할 수 있게 돼 있다.
청와대가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갖다 쓰던 관행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김대중 정부에서 없앴다. 박근혜 정부가 이를 되살린 것은 최고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국정원 예산이 잘못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청와대가 갖다 쓰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처럼 아무런 통제가 없으면, 국정원 예산이 국가 이익과는 무관한 일이나 부적절한 정치 개입 등 잘못된 일에 쓰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미국 등 외국에서도 정보기관 예산은 국민 일반에는 비밀로 하고 있지만, 입법부가 실질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회 정보위원회 등에서 제대로 심의하게 국정원법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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