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미군 상대로 몸을 팔던 여성이 미군 병사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던 ‘윤금이 사건’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 이후 22년 만인 2014년 기지촌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정부가 기지촌 내 미군 위안부 제도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으며, 이들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이용해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8일 이 소송의 2심 법원은 1심과 달리 국가의 책임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다. 기지촌의 유지·관리에서 국가가 능동적·적극적 역할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반인권적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것이다.
지난해 1월 나온 1심 판결은 1977년 성병감염자 격리수용을 규정한 ‘전염병 예방 규칙’ 시행 전에 격리수용된 여성 57명에게만 국가배상을 인정했지만 그 밖의 국가 책임은 받아들이지 않아 큰 아쉬움을 남긴 바 있다. 2심 재판부는 기지촌 위안부 강제 격리로 인한 정신적·육제적 피해를 1977년 이후까지 모두 포함해 인정했다. 특히 국가 책임의 범위를 크게 확대했고, 국가가 여성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했음도 적시했다.
판결 내용을 보면 우리 현대사의 치부를 대면하는 듯한 부끄러움과 참담함이 밀려온다.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정부는 공창제를 폐지하고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군이 주둔한 곳에 ‘특정윤락지역’을 지정해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군을 위한 공창제’를 따로 만들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 정부는 국가안보를 공고히 한다는 명분으로 기지촌 여성들을 한·미동맹의 윤활유로 활용했으며 더 나아가 외화획득 수단으로 삼았다. 공무원들을 동원해 기지촌 여성들에게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군의 ‘서비스 질 향상’ 요구에 응해 성병 감염이 의심되는 여성들을 ‘낙검자수용소’라는 곳에 감금했다. 치료 명목으로 페니실린을 과다 투여해 쇼크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원고 쪽 변호인의 말대로 국가가 사실상 ‘포주’ 노릇을 한 셈이다.
국가는 언제라도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개별 인권을 유린하는 범죄국가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이 주는 교훈일 것이다. 정부는 피해자들이 바라는 대로 국가가 저지른 과오를 겸허히 사죄하고 다시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천명해야 한다. 그래야 ‘인권국가’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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