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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겨레 사설] #미투는 일터와 일상의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등록 2018-03-01 18:12수정 2018-03-01 18:55

말 못 하거나 들리지 않은 외침
“당신 잘못이 아니다”가 바꿨다
성폭력 만든 성차별 구조 변화를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한달 전,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전한 이 말이 우리 사회를 바꿔놨다. 매일같이 각 영역에서 터져나오는 폭로에 누군가는 충격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말해도 외면받아왔던’ 또는 ‘외면받을까 말하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피해자들이 ‘이제는 말하면 바뀔 수 있다’는 신뢰와 용기를 갖게 된 것, 그리고 사회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언어’로 듣기 시작했다는 것. #미투가 몰고 온 가장 큰 변화다.

문단의 거장부터 인기 배우, 유명 사진가, 시사만화가, 천주교 신부까지 성폭력 사실이 드러났다. 무릇 예술의 본질이 기존 체제와 불화하고 저항하는 정신이라 믿었기에,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선 ‘진보진영의 몰락’이라며 정쟁의 도구로 삼지만, 오히려 각 영역에 권력형 성폭력 문화가 얼마나 일상이 됐는지를 드러낸 것이라 보는 게 상식이다. 특히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수십년간 벌여온 성폭력은 ‘침묵하는 당신 또한 가해자며 방조자가 아닌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졌다. 남성들 사이에서도 번져가는 #위드유는 이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대부분 가해자들은 처음엔 부인하거나 기억이 없다고 하다가 두루뭉술 사과에 그쳤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 많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피해자의 의도를 문제삼거나 사건 묘사에 주목하는 2차 피해도 여전하다. 예전처럼 반짝 주목받다가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으려면, 피해자의 개인적 폭로를 넘어 플랫폼을 만들고 법률적 지원 등을 해줄 시스템이 필요하다. 1일 출범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처럼 직종별 기구에서 신고를 받고 공적 담론화를 해나가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피해자가 명예훼손이나 무고 등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법적 논의 또한 이번에는 꼭 이뤄져야 한다.

#미투 물결의 한편에서, 여전히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말할 수 없는 피해자들이 많은 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명인들의 성폭력은 사회적 형벌이라도 받지만, ‘평범한’ 상사의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가 제기하기란 직장을 그만둘 각오가 없는 이상 쉽지 않다. 지난해 한샘이나 현대카드 사례처럼, 갑을관계와 남성중심 문화가 중첩된 권력구조의 가장 말단에 있는 피해자들 대부분은 어리거나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지위인 경우가 많다. 이주여성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의 할리우드 변호사·배우가 중심이 된 ‘타임스업’이 ‘성폭력 가해자가 속한 조직의 법적 처벌’을 활동 목표로 내건 것처럼, 가해자뿐 아니라 조직에 대해 엄한 책임을 묻는 방안 또한 논의할 때다. 긴 세월 권위주의적이고 조직을 우선하는 문화가 뿌리내린 일터의 근본적 변화를 끌어내려면 이런 ‘강제적 처방’이 불가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론 구성원 하나하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일터 문화의 확산이 중요하다. 성폭력 ‘범죄’를 피해자나 목격자들이 말하는 데 해고나 인사 불이익 같은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그것을 작동케 하는 구조가 일터의 민주주의다. 동시에 여성 혐오와 리벤지 포르노가 넘쳐나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일터만으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양성평등 교육 의무화 등 학교교육 개혁이 시급한 이유다. 지난 한달, 우리는 많이 변했지만 이제 겨우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에 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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