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기자회견을 취소한 뒤 한춘섭 충남도 공보관이 안 전 지사에게서 받은 문자 메시지를 읽고 있다.홍성/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8일 오후 기자회견을 예고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갑자기 이를 취소했다. 검찰에 출석해 조사받는 것이 우선적 의무라고 판단했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회견을 불과 2시간 앞두고 취소한 걸 보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안 전 지사가 세운 연구소의 연구원이 추가 성폭행을 주장하고 나선 마당에 회견을 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당분간 법적 대응에 주력하겠다는 속내도 엿보인다.
유불리를 계산해서 스스로 예고했던 기자회견을 취소했다면, 국민 분노를 가중시킬 뿐이다. 충청남도 공보관이 사죄 뜻을 대신 전하긴 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던 정치인인 만큼 국민 앞에 서서 직접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게 도리요, 국민과 지지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김지은 수행비서의 폭로 이후 안 전 지사 쪽은 ‘또 다른 피해자는 없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제2의 성폭행 피해자가 나서면서 거짓말을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캠프 내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은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는 우려의 말을 하고 있다. 두번째 피해자가 일했던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의 짐을 7일 새벽 서둘러 빼는 장면이 포착되는 등 증거인멸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제 철저한 수사를 통해 모든 진실을 온전히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 검찰은 안 전 지사 수사를 조금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안희정 캠프’에서 일했던 이들이 피해자 김지은씨 지지를 밝히면서 고발한 내부 실태는 적잖은 충격을 던진다. 비민주적 조직 문화가 ‘안희정이란 인물에 대한 맹목적 순종’으로 이어지며 ‘만연한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에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게 이들의 고백이다. ‘민주주의’를 대표 슬로건으로 내건 전도유망한 정치인 캠프의 실상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개인 일탈도 문제지만, 비판적 의견은 묵살하고 민주적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풍토가 성범죄를 키우는 온상이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는 일도 중요하다. 피해자의 ‘평소 행실’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왜 거절하지 않았느냐’고 하는 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행태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청와대 회동에서 꺼낸 ‘임종석 기획론’ 역시 농담이라지만 명백히 2차 가해에 해당한다. ‘정치적 목적’이나 ‘배후세력’을 들먹이며 사건 본질을 흐리는 음모론이 더는 나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