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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설] 제주 4·3 70년, 이제 ‘백비’를 일으켜 세울 때

등록 2018-04-01 17:49수정 2018-04-01 18:55

어느 사건이나 10년 단위의 해를 뜻깊게 새기는 법이지만, 제주4·3이 70년을 맞는 올해는 더욱 각별하다. 촛불이 타올랐던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처음으로 7일 국민문화제가 열리고 전국 20곳에 3~7일 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인가 하면, 작가·배우·정치인 등의 릴레이 캠페인도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 ‘제주만의 비극’에 머물렀던 4·3을 ‘대한민국’ 현대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 4·3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은‘백비’를 보고 있다.
제주 4·3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은‘백비’를 보고 있다.
2000년 4·3특별법 제정, 2003년 국가를 대표한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2014년 국가추념일 지정이 이뤄졌지만 아직 그늘에 묻힌 부분이 적잖다. 얼마 전 제주지법에서 재심청구 재판이 열렸던 4·3 수형인들의 아픔도 그중 하나다. 88살 김평국 할머니는 법정에 걸려 있던 ‘제77조 내란죄’라는 현수막으로 자신이 무슨 죄인지 짐작했을 뿐이라며, 죽기 전 명예라도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오면 전부 살려준다는 말을 믿었는데 잡혔다” “무장대에게 뭘 줬냐며 패는데 안 줬다 하면 죽이는 줄 알고 쌀 두되 냈다고 말했다”는 이들이 변호사도, 공소사실 낭독도, 판결문도 없는 불법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렇게 전국 형무소에 분산 수용된 이들은 2146명. 그나마 1999년 찾아낸 수형인명부로 처음 밝혀진 규모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평택 이남 수형자들 상당수는 즉결처분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유족들은 아직 이들 대부분의 주검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밝혔듯, 4·3은 1947년 3월1일 관덕정 앞 발포사건을 시작으로 다음해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거쳐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과정이다. 추산 희생자는 2만5천~3만명으로,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있지만 8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한 것으로 파악됐다. 무장세력 수백명을 이유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 희생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국가폭력’일 것이다. 남긴 상처는 깊고 길었다. 4·19 혁명 직후 진상규명 움직임이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 등장 이후 제주도민들은 반공법과 연좌제의 족쇄에 묶여 4·3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하며 고문 후유증과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으로 밀항했던 이들 가운데는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4·3은 3·1 발포와 탄압에 항의한 3·10 민관 총파업,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거센 여론 등 해방공간의 역사와 이승만 정부 및 ‘냉전의 렌즈’로 제주를 바라봤던 미 군정의 역할 등에 대한 이해 없이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념의 프레임을 덧씌우며 진압이 정당했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제주 봉개동 4·3기념관에는 ‘백비’가 누워 있다. 반란, 사태, 폭동, 항쟁, 운동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엇갈린 시선 속에 아직 제 이름을 새기지 못한 4·3의 아픔을 상징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지난 대선 주요 후보들은 희생자 배·보상 적극 검토 등 국가의 책임을 약속했다. 어쩌면 4·3을 생생히 증언할 생존자들이 마지막으로 맞이할 10년 단위의 해일지도 모른다. 한반도 평화를 향한 거대한 움직임이 시작되는 4월, 초기 냉전의 그늘 속에 빚어져 반공주의 시대 내내 낙인찍혀왔던 4·3의 올바른 이름을 찾는 일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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