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달, 속속 드러나는 양승태 대법원 시절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선 더이상 놀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제징용 재판의 거래 흔적에 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까지 무력화하려 했다는 보도엔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사이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기에 분노와 안타까움은 더하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2016년 1월초 작성한 대외비 문건에는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낼 예정이던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1심 결론을 미리 각하 또는 기각으로 제시해놨다. 한국 법원이 외국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을 담당할 수 없다는 ‘주권면제’나 대일협정상 청구권 소멸 등을 이유로 댔지만, 박근혜 정부가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한 데 코드를 맞춘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선 주권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국외의 선례나, 위안부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게 아니라고 본 우리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기존 판단과도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첨예하게 논의할 문제인데도 미리 일본에 ‘면죄부’를 주려 했다니 어느 나라 법원의 문건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심지어 문건엔 “각하/기각하되 일본 정부를 엄중히 꾸짖어 비판 여론을 무마한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고 한다. 법원 스스로도 12·28 합의와 이런 재판 결론에 대해 거센 반발이 일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의 책임과 사죄를 요구하며 싸워온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가 알까 낯 뜨거워지는 내용이다. 현재 이 재판은 3년째 1심에 계류 중인데 그사이 소송을 제기한 이들 절반이 숨졌다.
최근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기로 한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사건’도 대표적인 ‘재판거래’ 의혹으로 꼽혀왔다. 2012년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의 손배 책임을 인정했는데도 양승태 대법원 시절 재상고심은 기약없이 미뤄져왔다. 재상고심을 미루는 대가로 법원행정처가 외교부로부터 해외 파견 법관 자리를 더 얻어내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서라면 인권도 역사의식도 내팽개친 최고법원의 민낯, 그 끝은 어디까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