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가 북-미 비핵화 협상에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끝났다. 두 나라 외교장관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곧 다시 만나자’는 덕담을 주고받았지만, 양국의 견해차는 확연히 드러났고 팽팽한 기싸움도 계속됐다. 이런 식이라면 협상이 공전하는 교착 국면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통상의 협상 방식이 아닌, 양국 정상이 주도하는 새로운 방식의 해법을 모색할 필요성이 커졌다.
회의에 참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도 대북 제재의 중요성에 거듭 방점을 찍었다. 국제사회의 제재 이행도 촉구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도 북-미 공동성명을 동시적·단계적으로 이행해나가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강조하고, 미국이 한반도 평화보장의 ‘초보적 조처’인 종전선언 문제에서까지 후퇴하고 있다며 미국을 비판했다. 한쪽은 비핵화 조처를 앞세우고 다른 한쪽은 종전선언을 포함한 동시적·단계적 이행을 강조하면서 평행선을 달리는 형국이다. 더구나 이런 미묘한 국면에서 미국 재무부는 북한에 대해 추가적인 독자제재 조처를 단행하고 유엔도 북한의 유엔 제재 위반 사례를 발표해, 자칫하면 상황이 더 악화할 우려도 있다.
북-미 교착 상태 장기화는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협상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면 북-미 양국 정상이 앞장서 국면을 열어젖히는 ‘톱다운(위에서 아래로) 방식’을 더 적극적으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답신이 각국의 시선이 쏠린 국제회의장에서 북한 쪽에 전달된 것은 상징적이다. 이런 ‘친서 외교’의 효과가 협상이 공전하는 중에도 대화의 동력이 상실되지 않도록 해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국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압박 전술을 계속 쓰는 것은 미국 주류 사회의 북한 불신론을 의식한 면도 있다. 주류 사회의 협상 회의론을 불식하는 데는 톱다운 방식이 효과적이다. 북-미 정상이 싱가포르 회담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으니 필요하다면 핵심 사안을 놓고 전화로 소통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북-미 관계의 촉진자로서 우리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정부는 미국이 종전선언에 결단을 내리고 북한도 핵 시설 목록 제출 등 미국의 요구에 응할 수 있도록 양쪽을 설득함과 동시에 북-미가 동의할 만한 대안을 적극 제시해야 한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4일(현지시각) 성김 주필리핀 미국대사한테서 건네받은 서류 봉투를 열어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슈한반도 평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