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김 주필리핀 미국대사가 4일(현지시각)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 앞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서류 봉투를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방송에 나와 북한에 비핵화 실행을 촉구함과 동시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방북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볼턴 보좌관이 연일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비핵화 압박과 대화 병행이라는 강온 양면 작전 구사가 미국 행정부의 큰 흐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익숙한 방식만 고집해서는 지금의 교착 국면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북-미 협상이 공전을 되풀이하는 것은 북한의 관심사인 종전선언과 미국의 요구사항인 ‘핵시설 신고’를 놓고 양쪽이 힘겨루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무 협상 담당자들이 상대방에게 먼저 양보를 요구하는 낡은 협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상황을 꼬이게 하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양국 정상이 직접 나서는 것이 긴요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주 김 위원장에게 보낸 답신에서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이 기회에 북-미 정상이 종전선언과 핵시설 신고를 맞바꾸는 방안을 찾는 것을 검토해볼 만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장관에게 임무를 주어 김 위원장과 ‘종전선언-핵 신고 동시 교환’을 놓고 담판을 짓는다면 교착 국면이 뚫리면서 협상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다.
북한도 ‘종전선언 먼저’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종전선언과 핵시설 신고를 동시에 맞바꾸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동창리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장 폐쇄로 미국으로부터 종전선언을 받아낼 조건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관심은 핵실험장 폐쇄와 같은 ‘미래 핵 개발 중단’보다 이미 완성된 핵·미사일의 신고와 사찰에 있음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종전선언을 받아내려면 북한이 좀더 과감하게 비핵화 초기 조처를 단행할 뜻을 밝히는 게 바람직하다.
이 방향으로 북-미가 타협할 경우, 한국과 주변국들이 대북 제재 완화를 위해 움직일 공간도 넓어지게 된다. 북-미 협상이 교착 국면을 넘어서게 되면 1단계로 민생 분야의 대북 제재 해제가 이루어질 수 있고 남북 경제협력도 급진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정부는 촉진자로서 북-미 사이에 개입해 서로 만족할 만한 방안을 제시하고 양쪽을 설득해야 한다. 북-미 신뢰가 충분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더욱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중재력을 발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