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 규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가정폭력 강력 대응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수십년간의 폭력, 이혼 뒤 보호시설을 포함한 여섯번의 이사와 10여차례의 휴대전화 변경. 전남편에 의해 계획적 살인을 당할 때까지 그는 한순간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용기를 낸 신고도,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에게 국가의 보호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가정폭력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며 처벌법이 만들어진 지 20여년, 서울 강서구 아파트에서 전남편에게 살해된 40대 여성 사건은 여성의 지위 향상이 당연시되는 사회의 한쪽에선 ‘야만적’ 폭력이 여전한 현실을 아프게 일깨웠다. 최근 5년간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115만9천여건에 이르지만 검거율은 13%에 불과하다.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못 하는 가정폭력이 얼마나 많을지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응급조처와 임시조처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집안 갈등’ 정도로 치부하는 국가와 사회의 안이한 인식과 허점 많은 법·제도 속에서 피해자들이 설 땅은 없다. 경찰에 신고해도 격리 및 접근 금지의 긴급 임시조처가 이뤄지는 건 100명 중 0.4명꼴, 검찰에 접수된 100명 중 구속상태로 수사를 받는 사람은 0.8명꼴에 불과하다.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은 위반해도 과태료 500만원 미만에 불과하다. 미미한 처벌 속에 ‘협박’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번 사건도 딸들의 청와대 청원이 없었다면 ‘가정불화’가 부른 참극 정도로 묻혔을지 모른다. 690개 여성단체가 29일 연 기자회견에서 소개된 한 피해 상담자의 발언은 상징적이었다. “내가 죽어야 폭력임을 인정해줄 건가요? 그때서야 범죄가 되는 건가요?”
가정폭력은 가정 밖 폭력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형사범죄라는 사회적 인식과 국가의 엄중한 대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정폭력처벌법의 초점을 ‘가정 보호와 유지’가 아니라 피해자 안전과 인권 보호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정폭력범에 대한 상담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의 폐지 및 접근금지 조처 위반 시 처벌 강화, 피해자 동의가 있어야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반의사불벌죄 폐지 등을 위해 정부와 국회는 관련법 개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가정이 경찰에 의해 ‘재발우려 가정’으로 지정됐었는데도 제대로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감시가 되지 않았던 시스템 또한 전면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최근 가정폭력·데이트폭력에 대한 공포가 번져가며 ‘안전이별’이란 검색어까지 떠올랐다. 여성이 ‘이별범죄’를 두려워해야 하는 사회, 이젠 끝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