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왼쪽부터), 김지형 조정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협약서를 들고 악수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와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황상기 대표가 23일 반도체 백혈병 관련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서에 서명하고 손을 맞잡았다. 반도체 백혈병 분쟁 사태의 최종 매듭이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라인에서 일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에 걸려 2007년 3월에 숨진 지 11년8개월 만이다. 최종 마무리라는 점에서 다행스럽고 환영할 일이며, 10년 이상 지나서야 풀었다는 점에선 착잡하다.
김기남 대표는 이날 협약식에서 “병으로 고통받는 근로자와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만시지탄이나 공식 사과는 평가할 일이다. 김 대표는 이어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회사는 사과의 뜻과 함께 밝힌 약속을 이행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숙제를 안게 됐다. 이 점에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대표가 “오늘의 사과를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대목을 새겼으면 한다.
협약에 따른 보상 대상은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제1라인 준공 시점인 1984년 5월 이후 반도체·엘시디(LCD) 생산 라인에서 1년 이상 근무한 현직자와 퇴직자 전원이다. 지난 1일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에서 낸 중재안대로다. 구체적인 보상방안 논의는 제3의 독립기관인 법무법인 지평에 맡겼다. 여기서 정하는 대로 삼성전자는 2028년까지 보상을 실시한다.
삼성 쪽은 협약에 따른 보상 이행과 아울러 노동인권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실마리로 삼길 바란다. 반도체 백혈병 사태가 삼성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불거진 데는 노조 설립을 막고 노동자들을 대등한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은 삼성 쪽의 낡은 태도와 인식이 한몫했다는 점에서다. 산업안전 문제에 대한 더 전향적인 자세 또한 필요하다. 다른 계열사에도 유해물질을 다루다가 병든 노동자들이 있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 사업장에도 비슷한 피해자들이 있다는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은 물론, 기업의 중장기 실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정부 당국의 책임과 역할 또한 가볍지 않다. 국내 법규와 제도에선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너무 어려워 피해 노동자들이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절규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사업장에서 저질러진 사업주의 잘못을 엄정히 가려 처벌하고 필요하면 법·제도를 개선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사후 처벌보다 사전 예방이 더 근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업장에서 쓰이는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노동자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되도록 투명하게 알리고 공유함으로써 재해를 미리 막는 재료로 활용해야 한다. 삼성전자가 사태 재발 방지와 사회공헌의 하나로 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한 500억원의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이 이런 일에 요긴하게 쓰이길 바란다. ‘제2의 황유미’는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