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절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 자체가 불법이므로 국가가 그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하급심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고도의 정치행위라며 배상 책임이 없다고 한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취지다. 애초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작성한 법원행정처 문건에 ‘정부 협조 사례’로 등장하는 등 기존 대법 판결이 공정성에 대한 국민 신뢰를 상실한 터여서 대법원이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이동연)는 지난 6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이아무개씨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3억7천여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씨 등은 1978년 정권 비판 유인물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최대 1년형을 받고 복역한 뒤 40여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되려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재판부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가 고의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긴급조치가 유신헌법이 정한 요건에도 맞지 않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발령했다고 본 것이다. 긴급조치 발령행위 자체가 헌법 위반이고 그에 따른 일련의 수사와 재판도 위법하므로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15년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 국민 전체에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법적 의무를 지지는 않는다”는 논리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2년 전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비춰봐도 위헌’이라고 한 대법 판결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이 ‘민감한 정치적 사건에서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물밑에서 조율’해왔고 문제의 긴급조치 번복 판결도 ‘정부 협조 사례’로 꼽은 사실이 사법농단 문건에서 드러났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관심사인 긴급조치 등 과거사 사건이나 노동사건 등에서 무리하게 하급심을 뒤집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공정 재판’의 외양은 이미 무너졌다. ‘김명수 대법원’은 이번 긴급조치 사건을 비롯해 ‘사법농단’ 판례들을 바로잡아 결자해지에 적극 나설 책임이 있다.
13일 오전 대법원 앞에서 (사) 긴급조치사람들 등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모여 ‘긴급조치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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