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한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들이 머리 숙여 사죄하곤 하지만 정부 당국자가 사과하거나 책임지는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들다. 산재 방지에 직접적인 책임감을 가질 만큼 분명한 권한과 임무가 부여된 전담기관이 없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산재 방지를 강조해왔음에도 획기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시스템의 실패’를 증명한다. ‘일터의 죽음’이라는 사회적 참사를 막기 위해 총력전을 펼 인적·조직적 인프라를 시급히 보완해야 한다.
현재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감독관 1명이 담당하는 사업장은 4천개가 넘는다. 일반 근로감독관보다 4배가량 많다. 2016년 408명이던 산업안전감독관 정원을 현 정부 들어 705명까지 꾸준히 늘려왔는데도 이 정도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의 논문을 보면 30인 이상 기업의 산재 사건 은폐율이 66.6%에 이른다고 하는데, 산재 예방 정책의 기초라고 할 통계부터가 이처럼 부실한 것은 현장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밀착 관리하는 체계가 미흡한 실태를 보여준다.
산업안전에 대한 기술적 전문성을 지닌 기관과 실질적 행정권을 가진 기관이 유리돼 있는 것도 효율적인 산재 대처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산재 예방 정책 총괄은 노동부 6개 국·실 가운데 하나인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이 담당하고, 지방노동청들이 현장 지도·감독을 맡는다. 이와 별도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전문성을 갖고 연구·진단·기술지원 업무 등을 수행한다. 그런데 산업안전보건공단이 현장 점검을 통해 위험요인을 발견해도 노동부를 통하지 않고는 행정조처를 할 수 없다. 지난해 ‘이천 물류센터 공사 화재 참사’ 때도 업체가 제출한 ‘유해 위험 방지 계획서’를 심사한 산업안전보건공단이 화재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6차례나 개선을 요구했으나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해 11월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산재로 사망한 99명의 영정을 의자에 놓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영국의 경우 고용노동부의 산재 담당 조직과 산업안전보건공단의 기능을 아우르는 독립기관인 산업안전보건청(HSE)을 1974년 설립했다. 산재 예방을 위한 연구와 교육, 현장 관리·감독, 재해 발생 시 법 집행 권한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조사·감독관 1000여명과 전문가 1000여명을 포함해 240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산업안전 법규 위반 사건은 직접 수사와 기소까지 한다. 미국도 1970년 직업안전보건국(OSHA)이 설립돼 산업안전 교육과 기준 마련, 법 집행을 일괄해 담당하고 있다.
이 같은 통합기관은 산재 예방을 위한 정책 수립, 현장 관리·감독, 산재 발생 시 조사와 처벌, 재발 방지까지 유기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 특히 중대 사고가 날 경우 해당 분야 전문가가 조사에 참여해 형사적 책임뿐 아니라 근본 원인까지 파헤침으로써 재발 방지에 기여한다. 우리는 중대 재해가 일어나도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조사 권한이 없어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찰 수사에 의존해야만 한다. 엄정한 처벌과 함께 근본 원인을 정확히 짚어 실행에 옮기는 게 산재를 줄여나가는 첩경이라는 점에서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다.
정부도 산업안전을 전담할 독립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의 조직·인력을 확대·개편한 뒤 2023년을 목표로 산업안전보건청을 독립 출범시키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집행도 여기에 맡긴다는 구상이다. 전문성과 강력한 집행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산업안전 전담기관을 설치하는 일은 하루가 급하다. 정부와 국회가 머리를 맞대 최적의 방안을 만들고 추진에 속도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