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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자석]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 / 김선민

등록 2007-02-01 18:27

김선민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가위원
김선민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가위원
독자기자석
“학부형회에 가니 대부분 동년배더군. 우리 모두 80년대 운동권 노래를 불렀지.” 대안학교에 자녀를 보낸 한 선배가 뿌듯해하며 해준 이야기다.

그 선배의 사상적 영향력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 무척 컸다. 우리 사회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면서 살아야 했던 90년대에도 목숨을 담보로 하기까지는 않았지만 길고 지루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선배를 포함하여 80년대를 장식했던 사람들은 그 지루한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게 동시대를 살았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주었으니까.

며칠 전 직장 사람들과 연말정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한 어린 직원이 말했다. “저는 카드는 많이 못 썼지만 단체 기부금을 내서 환급을 좀 받을 줄 알았어요. 몇 십만 원을 냈거든요. 그런데 그 단체에 낸 돈은 공제 대상이 아니래요.”

알고 보니 그 친구가 돈을 낸 단체는 법인 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곳이란다. 앞으로도 그는 그 단체에 돈을 내겠다고 했다. 그는 1년 계약직, 이른바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시민단체에 꼬박꼬박 돈을 내고 연말정산 혜택도 받지 못했다. 남들은 정치헌금 십만원 내고 십일만원 돌려받을 때, 그 대신 시민단체에 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이뤄진 집단이 형성되어 있다. 한 집단은 젊은 학창 시절을 혹독하게 바쳤지만 얼마 후 화려하게 금의환향했다. 각계 고위층 명단에서 이름들을 심심찮게 본다. 그런데 그들이,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형으로 만나 운동권 노래를 불렀다고 뿌듯해한단다. 비싼 대안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부유해진 것 때문이라면, 과거 노래는 안 어울린다. 공교육의 문제점에 저항하는 몸짓이 연대감을 형성한 것이라면, 말발 안 서는 성명서라도 하나 만들었음직하다. 과거 그 실력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언제부터인가 시대적 채무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느낀다. 돈을 받지 않고 사회에 기여한 기억도 같이 없어졌다. 지식인은 모름지기 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약속 같은 것은, 잊은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 누구를 대변하지도 않았고, 나선 적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2007년 오늘 그 어린 비정규 직원을 향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심지어 “비정규직이라서 얼마나 좋아?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잖아?” 하고 염장 지르는 말을 위로랍시고 했다. “대통령도 비정규직인 건 마찬가진데” 하는 논리로도 위로했다 얼마나 미웠을까? 아니, 90년대 뭔가 열심히 주장하던 나의 모습을 학생 때 보던 그는 나를 무조건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2007년 벽두에도 새로 초라함을 느낀다. 하지만 초라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은 크게 바뀌었다. 그 비정규직 어린 직원의 바보 같은 기부금이 오늘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김선민 /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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