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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한나라 “믿었던 민주당마저…” 긴박했던 막후드라마

등록 2006-05-03 19:47수정 2006-05-03 19:52

6개법안 통과를 둘러싼 정당간 줄다리기·신경전 치열
민주노동당 “국회 생활 2년 하니 이제 정치가 좀 되네”
‘‘다윗의 힘’ 보여준 민주노동당’, ‘파행국회 진짜 승리자는 민주노동당’, ‘소수정당 저력 봤죠’….

3일 아침 주요 일간지에는 종합면의 한쪽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들이 실렸다. 전날인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석수 9석의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첨예한 대치상황에서 캐스팅 보트를 절묘하게 활용해, 주민소환제법 제정안과 국제조세조정법 개정안 두가지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 것을 평가한 내용이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2일의 ‘성과’를 두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듯 거대정당의 저지와 방해를 뚫고 자칫 무산될 뻔한 주민소환제를 처리했다. 민주노동당의 존재가치를 확인했다”고 자평했고, 박용진 대변인은 “민주노동당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부패나 비리에 연루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주민들이 소환투표를 통해 퇴출시킬 수 있도록 하는 주민소환제 도입은 지난 2일 폐회된 4월 임시국회에서 사실상 물건너가는 분위기였다.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면서도 부작용 가능성을 들어 강력 반대하는 한나라당과, 이를 의식한 열린우리당의 미온적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2일 본회의를 앞두고 “주민소환제법안을 직권상정하지 않으면 협조할 수 없다”는 민주노동당의 막판 ‘베팅’이 먹혔다.

현재 전체 국회의석은 296석으로, 열린우리당 142석, 한나라당 124석, 민주당 11석, 민주노동당 9석, 국민중심당 5석, 무소속 5석이다. 거대 두 정당은 의석 한 자리 수의 ‘제4당’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2일 국회 본회의 직전까지 숨막히는 4~5일을 보냈다. 민주노동당을 가운데에 놓고 그 시간들을 재구성해본다.


4월28일(금요일)

열린우리당은 “사립학교법 재개정이 안되면 다른 법안들 처리에도 협조할 수 없다”는 한나라당의 ‘연계전략’에 결국 3·30 부동산 대책 후속 법안 등 주요 법안을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의사 정족수(149석)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민주노동당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에 급히 만남을 요청했다.

밤 10시30분에 열린우리당의 김한길 원내대표와 조일현 원내수석부대표, 민주노동당의 천영세 의원단 대표와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한길 원내대표는 부동산 관련 법안은 물론 동북아역사재단 설립·운영법, 주민소환제법, 국제조세조정법 등 16개 법안의 목록을 내놓으면서 “이들 법안을 직권상정 처리해달라고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천영세 대표는 이들 법안 처리에 공감을 표했다. 국회의장이 이들 법안을 모두 직권상정 처리한다면 협조할 수 있다는 뜻을 사실상 표한 것이다. (그에 앞서 이날 밤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한길 원내대표,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다음날 아침 청와대 조찬회동이 잡혔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다.)

4월29~30일(토~일요일)

노무현 대통령은 김한길·이재오 원내대표와의 조찬 회동에서 열린우리당에 사립학교법 재개정 양보를 권유했다. 열린우리당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토요일 야간 긴급의총에 이어 일요일 의총에서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의 양보 권유를 거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말에 진정성이 있었다”면서 열린우리당에게 “대통령 말을 들으라”고 촉구했다.

5월1일(월요일, 노동절)

열린우리당은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주민소환제를 포함한 16개 법안을 직권상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김 의장은 부동산 3법과 동북아역사재단법 등 4개만 직권상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둘러’ 김 의장의 결단에 다급해진 한나라당은 민주노동당을 상대로 치열한 설득전을 벌였다. 이재오 원내대표는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단 대표를 찾아가 열린우리당에 협조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 원내대표는 이 자리에서 “사립학교법과 다른 법안 처리를 연계하지 않겠다. 민주노동당이 원하는 법안들에도 협조할테니 5월 임시국회를 열어서 처리하도록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를 거절했다. 한나라당의 ‘사학법 재개정과 다른 법안 연계 처리’ 포기 약속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한편으로는 4개 법안만 직권상정한다는 방침을 비판하면서 김원기 국회의장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을 동시에 압박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기자실에 와서 “(그동안 주장해왔고 열린우리당과도 약속했던) 주민소환제와 국제조세조정법을 직권상정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열린우리당에 협조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한나라당 쪽에는 “사학법 재개정 연계처리 주장을 확실하게 포기하고, 5월 국회에서 다른 법안들을 특정 날짜를 잡아 처리하겠다고 약속하면 한나라당에 협조하겠다”는 신호도 보냈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직권상정이라는 초유의 방식에 협조하는 데 걸맞는 명분(또는 실리)을 챙겨야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제안은 위험부담도 큰 것이었다. 김원기 의장이 한번 퇴짜 놓은 주민소환제를 직권상정 대상에 포함시켜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는데, 이 경우 민주노동당은 “당신들 때문에 결국 부동산 3법과 동북아역사재단법도 처리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나라당도 사학법 재개정 연계처리 방침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리는 없는 상태였다. 민주노동당 일부 의원들도 이를 내심 걱정했으나, 심 수석부대표는 “걱정 마시라. 오늘 밤 사이 역사가 세번은 바뀐다”며 배짱을 보였다.

민노당 심상정 수석부대표 “걱정말라. 오늘 밤 역사가 세번 바뀐다”

실제로 그날 밤 역사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밤샘 대치를 했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서울 한남동 김원기 국회의장 공관을 찾아가 주민소환제법안을 직권상정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김 의장은 “여야가 합의하지 않은 정치관계법을 직권상정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같은 시간 한나라당 의원 30여명은 김 의장 공관 담을 넘어 들어가 ‘봉쇄 농성’을 벌였다. 국회의장실은 의장실 나름대로, “민주노동당이 뒤늦게 배신해, 일을 그르치려 한다”는 불만을 민주노동당 쪽에 전했으며, 민주노동당은 주민소환제 요구가 ‘뒤늦은 추가 요구’가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일관되게 약속해온 사안이라는 점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5월2일(화요일. 본회의 날)

김원기 국회의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에 포위돼, 결국 출근을 포기했다. 그 대신, 국회법 12조에 따라 열린우리당 소속인 김덕규 부의장에게 직무를 넘겨줬다.(*국회법 제12조 “의장이 사고가 있을 때에는 의장이 지정하는 부의장이 그 직무를 대리한다”)

권한을 넘겨받은 김 부의장은 주민소환제와 국제조세조정법을 포함해 모두 7개의 법안을 직권상정 처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김원기 국회의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을 덜 느낄 처지였다.

한나라당은 김원기 국회의장을 붙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덕규 부의장의 신병을 확보하진 못했다. 김 부의장이 1일 밤부터 2일 본회의 전까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2일 오후 2시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에 ‘안전하게’ 나타나 사회를 봤다.

한나라당, 막판에 내심 믿었던 민주당에 허찔려
민주당 “모두 민주당이 찬성해온 법안들이다”

한나라당은 그래도 민주당이 직권상정 처리에 협조하지 않을 것으로 굳게 믿었으나, 민주당 의원들은 오후 들어 태도를 바꿔 본회의장에 들어섰다. 모두 민주당이 찬성해온 법안들이기 때문이라고 이낙연 원내대표는 설명했다.

허를 찔린 한나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들어와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투표를 몸으로 막으려 했지만, 회의는 25분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개 안건 중에 임대주택법 개정안만 처리하지 못했다.

김 부의장이 산회를 선포한 뒤,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주민소환제는 ‘민주노동당 법안’”이라며 “큰 보람과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브리핑했다. 주민소환제법은 1997년 권영길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 전신)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건 이래 민주노동당의 줄기찬 공약이었다. 이번에 이영순 민주노동당 의원 대표발의안으로 통과됐다. (물론, 한나라당도 2002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4년 총선 뒤 박근혜 대표가 정동영 열린우리당과의 ‘5·3 협약’에서 도입 약속을 재확인했으며, 올해 4월 임시국회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의 주요 당직자들이 텔레비전 토론회 등에서 찬성 의견을 밝혔었다.)

김성희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3일 “거대 두 정당이 첨예하게 맞붙을 때에는 소수정당이 실리를 챙기기가 사실상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명분과 원칙대로 가는 게 옳다는 판단에 따라 움직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 생활 2년 하더니 이제 정치가 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겨레> 정치팀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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