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선거 패배로 재정난 가중
2004년 ‘천막당사’ 시절과 상황 비슷
경비절감 외 당 쇄신의지 부각 기대
김성태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오른쪽 둘째) 등 지도부가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우성빌딩에 차린 새 당사에서 현판식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새로 옮긴 서울 영등포 자유한국당 당사 정문 출구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온 김성태 당 대표 권한대행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당 사무실이) 2, 3층이니까 걸어다니면 된다”고 말했다. 한 당직자는 사무실 에어컨을 이제 설치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기계공구상가 근처에 자리잡은 당사 건물 주변엔 ‘지게차 매매’ ‘퀵 화물’ 간판 등이 보였고, 2층 창가 높이엔 전봇대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반듯반듯한 정당 당사들이 모여 있는 여의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자유한국당이 11일 ‘여의도 당사 11년 시대’를 접고 영등포로 당사를 옮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지난해 대통령선거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연이어 참패한 뒤 가중된 당 ‘재정난’이 주요 원인이다. 새 당사인 영등포구 우성빌딩 2개 층의 경우, 여의도 당사 시절보다 월 임대료를 8000만원가량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권한대행은 새 당사에 ‘자유한국당’ 현판을 건 뒤 “기득권과 관성, 잘못된 인식과 사고는 여의도 당사에 버려두고, 여기선 오로지 국민들의 삶만 생각하는 진정한 서민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은 2007년부터 여의도 한양빌딩을 당사로 사용했다. 이 빌딩이 나름 ‘여의도 명당’으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한양빌딩에 1997년 입주한 새정치국민회의는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의 기쁨을 맛봤고, 2003년 입주한 민주노동당은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이 당선되는 ‘진보 돌풍’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자유한국당의 전신 신한국당은 1997년, 2002년 대선 연속 패배 이후 ‘당사 이전 프로젝트’까지 가동하며 한양빌딩에 입주했다. 이 빌딩 당사에서 두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지난해 대선과 올해 지방선거 등에서 참패하며 ‘여의도 영광의 시대’가 저물었다.
그간 정당들은 경비 절감 목적과 함께, 당 쇄신 의지를 드러내는 효과도 기대하며 당사를 옮기곤 했다. ‘차떼기’ 수법으로 불법대선자금을 받은 게 드러난 뒤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은 2004년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 지휘 아래 여의도 공터에 ‘천막 당사’를 차리며 돌파구를 찾았다. 비슷한 시기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도 ‘민생 정당’ 의지를 내걸고 영등포 청과물상가 폐건물로 당사를 이전한 바 있다. 이날 자유한국당의 한 당직자는 당사를 옮긴 뒤 “천막 당사로 옮겨가던 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당의 활로를 찾아야 하는 과제 앞에 다시 놓였다는 무거운 분위기가 당 내부에 흘렀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