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후보직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청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사과는 없고 시종일관 당당했던 사퇴 기자회견
친일 발언 파문·국정 혼란 국회·언론에 책임 돌려
“검색창에 문남규 삭주 쳐보라” 엉뚱한 주문도
13분간 기자회견문 읽고 질문에 답변 없이 자리 떠
친일 발언 파문·국정 혼란 국회·언론에 책임 돌려
“검색창에 문남규 삭주 쳐보라” 엉뚱한 주문도
13분간 기자회견문 읽고 질문에 답변 없이 자리 떠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는 24일 사퇴하는 순간까지 ‘남 탓’만 했다. 2주간 문 후보자로 인해 혼란을 겪은 국민들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당당했다. 문 전 후보자가 자신을 변호하려는 장으로 설정한 ‘사퇴 기자회견’은 역설적으로 그가 총리가 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생생히 보여주는 자리가 됐다.
오전 10시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연 사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진실’이 아니며 국회의원과 언론의 잘못으로 사퇴하게 됐다는 주장을 폈다. 문 전 후보자는 13분간 읽어나간 사퇴 회견문에서 먼저 ‘자신이 몸 담았던’ 언론계를 탓했다. 그는 “발언 몇 구절을 따서 그것만 보도하면 문자적인 사실보도일 뿐이다. 그것이 전체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진실보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본인에 대해 제기된 ‘식민사관’과 “우리 민족은 게으르다”는 식의 ‘민족성 비하’ 논란 등이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비롯된 것이지,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식이다.
문 전 후보자는 언론보도 뿐 아니라, 여론 자체에 대해서도 불신 태도를 보였다. 이날 민주주의의 두 요소로 ‘여론과 법치’를 꼽은 문 전 후보는 “국민의 뜻만 강조하면 여론 정치가 된다.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 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고 말했다. 지난해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단에서 “대중은 우매해서 선동, 조작되기 쉽다”고 한 발언과 비슷한 맥락이다. 누구보다 여론에 민감해야 할 언론인 출신의 발언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여론을 무시하는 듯한 문 후보자의 이런 태도는 국무총리로서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이런 언론·여론관으로서는 박근혜 정부의 고질적 문제점인 ‘불통’과 ‘공감 능력 부재’를 진정시키기보단, 오히려 확대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 전 후보자는 이날 사퇴 회견문만 읽고 기자들의 질문에는 전혀 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취하는 방식이며, 남재준 전 국정원장도 지난 4월 대선 개입 사건 수사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똑같은 태도를 취한 바 있다. 문 전 후보자는 지난 16일 ‘야당이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야당에 물어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문 후보자는 이날 “대통령께서 총리 후보를 임명했으면 국회는 법 절차에 따라 청문회를 개최할 의무가 있다”며 “그러나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신성한 법적 의무를 지키지 않고 저에게 사퇴하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며 여야 국회의원들을 탓했다. 인사청문 절차도 거치지 못한 채 사퇴하는 상황에 대한 억울함을 표시한 것인데, 청문회를 열려면 먼저 임명권자인 박 대통령이 결재를 해야 한다. 청문회가 열리지 않은 건 국회의원들이 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 문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요청안에 대한 결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전 후보자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안함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지난 2주간 국정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의 식민사관과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일본 극우파들이 그를 칭찬하는 등 한-일 관계에서 국가적 망신을 초래했고, 위안부 관련 협상에서 우리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또한번 아픈 상처를 건드렸지만, 이날 회견에서 문 후보자는 이와 관련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퇴 이유로 “제가 사퇴하는 것이 박 대통령을 도와드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도 그분이시고 저를 거두어드릴 수 있는 분도 그분”이라고 말했다. 국민은 안중에 전혀 없고, 오로지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문 후보자가 총리가 되었다면, 그가 어떤 식으로 총리 업무를 해나갔을 지 충분히 짐작될 뿐 아니라, 그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박 대통령이 왜 그를 총리로 임명했는지 그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문 후보자는 끝으로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자랑을 꽤 길게 언급했다. 문 전 후보는 “뜻하지 않은 기쁨을 갖게 됐다”며 “검증과정에서 뜻밖에 저의 할아버님이 1921년 평북 삭주에서 항일투쟁 중에 순국하신 것이 밝혀져 건국훈장 애국장이 2010년에 추서된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전날 국가보훈처가 문규남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추정하고 있다는 데 대한 자랑이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검색창에 문남규·삭주 이렇게 한번 쳐보시라”고 말하기도 했다.
총리 지명 뒤 이날 사퇴까지 14일 동안 문 후보자는 자신이 남한테 준 아픔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만 집중하다 막판에는 수십년간 한 번도 찾지 않던 ‘할아버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기객관화 능력이 떨어지고,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총리는 물론, 기자를 하기에도 적합치 않은 모습이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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