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18일 오전 경기 파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개보수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18일 판문점으로 향하는 길은 봄이 한창이었다. 노곤한 봄볕을 받은 벚나무는 하얀 꽃망울을 터뜨렸다. 군사분계선 남쪽 비무장지대에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논두렁은 노란 민들레가 덮었다.
공동경비구역(JSA) 안에 있는 판문점의 진입도로는 1번 국도다. 전남 목포에서 출발하는 이 국도는 서울과 개성, 평양, 신의주까지 이어진다. 길은 있지만 갈 수 없는 길이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합동 병영인 캠프 보니파스를 떠난 버스는 10분이 채 못 돼 판문점에 다다른다. 양쪽 사이의 거리는 2.4㎞다. 보니파스라는 부대 이름은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때 숨진 주한미군 대위 아서 지 보니파스의 이름을 땄다.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은 문재인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다. 당시 문 대통령의 소속 부대는 도끼 살인 사건 뒤 판문점 내 남쪽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를 자르는 작전을 수행했다.
판문점의 색깔은 하늘색이다. 곳곳에 이곳을 관할하는 유엔군 사령부를 상징하는 하늘색 간판들이 들어서 있다. 군사분계선 위에 세워진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 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 건물도 하늘색이다. 판문점은 넓지 않다. 동서로 800m, 남북으로 400m가 전부다. 군사분계선 남쪽엔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이, 북쪽엔 판문각과 통일각이 대칭을 이루며 서 있다.
판문점의 옛 이름은 널문리다. 공동경비구역 안보견학관은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판문점 자리는 원래 널문리라는 이름의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6·25 전쟁 당시 휴전회담 장소였던 개성의 내봉장 부근이 잦은 전투로 위협을 받게 되자 1951년 9월6일 회담 장소를 널문리로 옮겼다. 그때 중공군 대표들이 회담장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인근 주막에 ‘판문점’이라고 쓰인 간판을 걸어뒀는데 여기서 판문점이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이다. 판문점의 판은 널문리의 널을, 점은 주막을 의미한다.”
판문점은 남북 분단과 회담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지금의 공동경비구역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휴전 협상은 765차례나 열렸다. 이후 지금까지 남북은 1971년 남북 적십자 파견원 1차 접촉을 시작으로 이곳에서 369차례의 크고 작은 회담을 열었다.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남쪽 평화의 집에서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군사분계선에서 어림잡아 약 300m 거리이고, 지난해 11월 탈북한 북한 병사 오청성씨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곳에서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건물 정문엔 임시 파란색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작업이 거의 끝난 듯 눈에 띄는 인부들은 두세명 정도가 전부다. 평화의 집은 1998년 남북 사이의 연락 업무를 하려고 지어진 4층짜리 건물이다. 주요 군사회담과 정치·경제·체육회담 장소로 쓰였다. 1층엔 로비와 기자실, 편의시설이, 2층엔 회의실과 사무실, 대기실이 있다. 3층엔 남북 연락사무소와 남북 적십자 연락사무소, 대회의실이 있고, 4층엔 전망대와 다용도 공간이 위치한다. 이곳엔 남북 사이를 잇는 직통전화가 설치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2층에서 열린다. 오찬과 만찬 역시 이 건물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평화의 집에서 100m가량 떨어진 자유의 집 앞에 서면 회담 당일 김 국무위원장의 동선을 어림잡을 수 있다. 자유의 집 앞에서 약 5m 앞이 군사분계선이다. 남북을 서슬퍼렇게 가르는 선은 철조망도 벽도 아니다. 너비 50㎝, 높이 5㎝의 콘크리트 판이 전부다. 이 위에 임시 건물인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 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이 자리한다. 3개의 푸른색 건물 사이로는 통로 2개가 있다. 너비가 3m가량으로 성인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올 만한 정도다. 통로 북쪽은 모래가, 남쪽엔 자갈이 깔려 있다. 김 위원장이 걸어서 방남한다면 콘크리트 턱을 넘어 이 길을 통과할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문 대통령 역시 그곳에서 그의 손을 잡을 것이다. 세계의 눈과 귀가 쏠릴 공간이다. 남과 북은 18일 2차 의전·경호·보도 실무회담에서 두 정상이 첫 악수를 하는 순간부터 주요 일정과 행사를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알리기로 합의했다.
김 위원장이 걸어오지 않고 차를 타고 온다면 그 길은 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 옆으로 난 길이 될 것이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올라갔던 길이다. 현재 이 길은 듬성듬성 잡초가 난 비포장길이다. 앞엔 출입을 통제하는 차단봉이 설치돼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김 위원장이 어떻게 군사분계선을 넘을지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면 67년 전 정전회담이 열렸던 판문점은 남북의 종전 협상을 포함한 항구적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임종석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은 지난 17일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 간 판문점 회담이 정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의제”라며 “이번 판문점 정상회담이 남북관계를 넘어 북-미 문제가 풀리는 계기가 되고 북-미 회담 장소가 된다면 몰타회담보다 더 상징적인 회담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89년 미-소 정상이 만나 냉전 종식의 주춧돌을 놓은 지중해의 몰타에 비견될 만큼 판문점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상징적인 장소가 될 것이란 바람과 기대를 담은 것이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판문점에도 봄이 왔다. 분단의 고통이 시작된 판문점이 평화의 장으로 거듭나기에 계절도 맞춤하다. 이제 일주일 뒤면 평화의 집의 문이 열린다. 판문점/성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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