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2일 밤 국빈 만찬을 마친 뒤 싱가포르의 상징이 된 마리나 베이 샌즈 전망대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마리나 베이 샌즈는 북미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문해 화제가 됐던 곳이다. 싱가포르/연합뉴스
“한국에는 싱가포르에는 없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또 하나의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남북 경제협력입니다. 한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경제지도를 그리게 될 것입니다. 남북은 경제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싱가포르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12일 ‘싱가포르 렉처’ 연설 한 대목이다. 문 대통령이 ‘비핵화 초기 단계’에 남북 경제협력과 남북 경제공동체를 화두로 꺼내든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유엔 등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 제재를 고려해 지금 당장 본격적인 남북 경협에 나서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하루빨리 평화체제가 이뤄져 경제협력이 시작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체제→경제협력’ 순서다.
그럼에도 ‘남북경협’이라는 화두는 의미심장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6~7일 방북 뒤,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이행 프로세스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종전선언 문제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남북 경협에 시동을 걸겠다는 메시지로 읽혀서다. 실제 4·27 판문점 선언에 명시된 ‘가을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남북 경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뒤 첫 대통령 수석보좌관회의(4월30일)에서 “10·4 정상선언과 남북 경협 추진을 위한 남북 공동 조사연구 작업이 시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경협 준비에 힘을 쏟으라는 주문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두차례 직접 만난 사실을 언급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은 이념 대결에서 벗어나 북한을 정상국가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매우 높았다. 비핵화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나라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강조법이다. 그러고는 연설 뒤 문답 과정에서 6·12 북-미 공동성명의 핵심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한 체제에 대한 안전보장과 적대관계 종식을 서로 맞바꾸기로 한 것”이라고 요약했다. ‘비핵화’만 앞세워서는 일이 풀리지 않을뿐더러, 북-미 정상의 합의 정신에도 반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문 대통령은 “실무협상 과정에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하고는, “만약에 국제사회 앞에서 (북-미) 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미 모두 ‘자기 관심사’만 앞세우지 말고 서로 배려하며 풀어가는 게 좋겠다는, 형식논리상 ‘중립적 권고’인데 실제론 대미 메시지의 측면이 강하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가 평화를 이루면 싱가포르, 아세안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지역이 될 것”이라며, 아세안에 북한과 관계 확대를 당부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과정의 일정한 진전 뒤 본격화할 북한 경제 재건을 포함한 한반도 평화·번영의 자양분이 될 국제협력의 기반 다지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연설은 올해 상반기 격변한 한반도의 미래를 염두에 둔 연설”이라며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의 2탄인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집권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7월6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한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며, ‘대한민국 새 정부의 한반도 평화 구상’을 처음으로 밝힌 바 있다.
이제훈 선임기자, 싱가포르/성연철 기자
nomad@hani.co.kr
☞ 싱가포르 렉처는?
싱가포르 렉처는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가 싱가포르 외무부 후원으로 자국을 방문하는 주요 정상급 인사를 초청해 연설을 듣는 세계적 권위의 강연 프로그램이다. 1980년 10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 시카고대 교수를 시작으로 고 김대중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등이 강연을 했으며, 문 대통령은 42번째 강연자다.
[화보] 문 대통령 인도·싱가포르 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