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역인근 공중전화를 걸기 위해 평양시민들이 몰려있는 사이로 아이들이 얼음과자를 먹으며 장난스럽게 지나가고 있다. 평양/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A State of mind’
영국의 다큐멘터리 작가 대니얼 고든은 2004년 제작한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어떤 나라〉라는 ‘탈색된’제목으로 개봉됐지만 기자가 북한 사회를 보고 느낀 첫인상은 되려 원제와 가깝다. 올 여름 큰물피해 뒤 한국언론으론 처음으로 〈한겨레〉가 찾은 북 사회는 여전히 ‘It’s all in a state of mind(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의 나라였다. 적어도 눈길가는 곳마다 ‘가는 길 힘들어도 웃으며 가자’같은 붉은 글씨의 구호로 가득찬 거리 풍경은 그랬다.
〈한겨레〉는 새해 첫날 학용품이 모자란 북한 어린이들에게 공책생산 공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한겨레〉2006년 1월1일치 1면 참조)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사업은 진행됐다. 지원사업을 담당한 ‘한겨레통일문화재단’책임자와 남쪽 인쇄업자, 공장을 보수할 창틀건설업자 등 방문단은 이달 6일부터 9일동안 평양을 찾았다.
이들과 함께 방북한〈한겨레〉취재진이 나흘동안 지켜본 평양은 평화롭고 안정돼 보였다. 방문단은 사흘간 평균 서너곳씩 평양시 주요 기념물을 보기 위해 아침마다 ‘HYUNDAI’로고의 소형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오전 9시 창밖으로 보이는 시민들은 부지런히 출근을 했다. 평양시 주요도로는 왕복 8차선이었지만 차는 거의 없었고 시민들은 자전거를 많이 탔다.
남성들은 대부분 검은색이나 카키색의 인민복(중국의 정치가 쑨원이 일상생활에 편리하도록 고안한 옷. 주름이나 장식을 배제한 단순한 디자인으로 실용성을 강조했다)차림이었지만,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기고 양복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몇몇 젊은 ‘댄디’도 보였다.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검정 저고리부터 노란색 원피스까지 옷차림이 다양했다. 평양지하철 ‘붉은별역’입구에서도, ‘부흥역’에서도 시민들은 분주히 오고갔다. 그곳에선 ‘일상의 냄새’가 풍겼다.
첫날 방문단과 환영만찬을 함께 한 북측 관계자의 말투에서도 당당함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는 “북은 이미 84년에 남이 큰물피해를 봤을 때 쌀과 구호품을 보냈다. 이번엔 우리가 어려우니 도움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위엄과 자신감을 잃지않는 태도였다. 첫 만남의 긴장이 몇순배 술로 풀리면서 기자는 ‘저 정도의 자신감이 있다면 체제를 좀더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사회주의 사법 시스템이 궁금하다. 북의 법정을 방청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튿날 사진기자가 큰물피해 현장을 취재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북측은 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내밀한 상처’를 보여줄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58번째 9·9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을 맞는 북 사회를 엿볼 창은 뜻밖에 다른 곳에서 열렸다. 사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난 8일 저녁〈한겨레〉취재진은 만찬자리에서 북 관계자에게 “평양의 9·9절 풍경을 보고 싶다. 금수산 기념궁전 취재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북은 오랜 내부 논의끝에 승낙했다.
비가 가늘 게 긋던 9일 아침 8시. 이른 시간이었지만 각지에서 올라온 참배객들은 김 전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을 상징하는 너비 415m, 길이 216m의 기념궁전 광장이 좁아보이리만치 길게 줄 서 있었다. 방문단 차량은 출입문을 통과하자마자 광장 입구 검문소 앞에서 멈췄다. 6명 모두 차에서 내려 검문소에 들어갔고 금속 소지품을 검색하는 5미터 길이의 스크린 앞을 통과한 뒤 다시 차에 올랐다. 금수산 기념궁전 방부처리된 김일성 전 주석, 주민들 ‘살균용 에어커튼’ 통과뒤 참배
5분 뒤 기념궁전의 거대한 기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념궁전은 서양식 벽과 기둥에 전통 양식의 지붕을 얹은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기자가 입구에서부터 위압감을 느낀 것은 현관에 ‘차려총’자세로 선 인민군이 지닌 칼리시니코프 에이케이(AK)-47 소총의 총검과 탄창이 은으로 도장돼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3m가 넘어보이는 김일성 전 주석 ‘립상’(입상)이 있었다. 홀에선 은은한 형광조명 아래로 장조풍의 장송곡이 흘렀다. 참배객들은 3열 종대로 서서 립상에 잠시 고개 숙인 뒤 ‘울음홀’로 들어갔다. 천정 높이가 3m를 넘는 건물이라 2층에 올라가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타야했다. 전원 키가 180cm를 넘어보이는 경호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이방인’들을 쳐다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방부처리된 김 전 주석의 관에 참배하고 나오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 일렬로 선 사람들 가운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여성들이 많았다. 방에 들어가기에 앞서 방문단은 살균용 에어커튼을 통과했다. 방은 족히 가로·세로 15m가 넘어보였다. 20룩스(lux)이하의 어두운 술집 정도 조도였다. 그 한가운데 혁명가, 정치가, ‘백두체’(김 전 주석의 필체를 다듬어 만든 글씨체.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흘려쓴 느낌이다. 김일성 종합대학 문패가 백두체로 씌여있다)글씨체의 창시자가 유리관에 누워있었다. 상페테르스부르크의 어머니 묘 옆에 묻히길 원했지만 방부처리된 레닌이나 화장 뒤 베트남 강산에 뿌려지길 원했지만 역시 방부처리된 호치민처럼 그도 ‘영원히 썩지않는’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창백해 보였지만 살아있는듯 피부에 탄력이 느껴졌다. 양복차림의 김 전 주석은 얼굴만 보였을 뿐 가슴께부터는 꽃다지에 파묻혀있었다. 관 주변의 하이라이트로 피부는 투명해보일 정도였다. 일렬로 줄선 참배객들은 먼서 관의 발 부분에서 4명씩 서서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그뒤 관의 왼편 → 머리맡 → 오른편에서 각각 한번씩 모두 네번 참배했다. 홀에는 장중한 음율이 흘렀다. 참배객들은 이런 식으로 관을 한바퀴 돈 뒤 방을 나왔다. 이웃한 방에는 김 전 주석이 세계각국에서 받은 훈장과 명예학위 등이 전시돼 있었다. 소련·동독·루마니아…이제는 사라진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름이 눈에 많이 띄었다. 김 전 주석이 생전에 누빈 세계각국 방문 경로, 김 전 주석이 탔던 승용차, 김 전 주석이 모스크바 횡단 여행중 탔던 집무용 열차도 전시돼 있었다. 30분 뒤 건물밖으로 나와 바라본 광장은 여전히 붐볐다. 평양공항으로 가는 길목마다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구호가 유독 자주 보였다. 같은날 12시 이륙하는 고려항공의 중국 심양행 튜보레프(Tupolev)Tu-154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양은 여전히 김 전 주석의 도시처럼 보였다. 첫날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를 맞이하고 보낸 것이 공항 건물 옥상의 거대한 김 전 주석 초상화였던 것처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대동강 보트장에 나와 여유롭게 보트를 타고 있는 평양 시민들. 평양/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첫날 방문단과 환영만찬을 함께 한 북측 관계자의 말투에서도 당당함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는 “북은 이미 84년에 남이 큰물피해를 봤을 때 쌀과 구호품을 보냈다. 이번엔 우리가 어려우니 도움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함을 솔직히 인정하되 위엄과 자신감을 잃지않는 태도였다. 첫 만남의 긴장이 몇순배 술로 풀리면서 기자는 ‘저 정도의 자신감이 있다면 체제를 좀더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사회주의 사법 시스템이 궁금하다. 북의 법정을 방청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튿날 사진기자가 큰물피해 현장을 취재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북측은 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내밀한 상처’를 보여줄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58번째 9·9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일)을 맞는 북 사회를 엿볼 창은 뜻밖에 다른 곳에서 열렸다. 사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난 8일 저녁〈한겨레〉취재진은 만찬자리에서 북 관계자에게 “평양의 9·9절 풍경을 보고 싶다. 금수산 기념궁전 취재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북은 오랜 내부 논의끝에 승낙했다.
비가 가늘 게 긋던 9일 아침 8시. 이른 시간이었지만 각지에서 올라온 참배객들은 김 전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을 상징하는 너비 415m, 길이 216m의 기념궁전 광장이 좁아보이리만치 길게 줄 서 있었다. 방문단 차량은 출입문을 통과하자마자 광장 입구 검문소 앞에서 멈췄다. 6명 모두 차에서 내려 검문소에 들어갔고 금속 소지품을 검색하는 5미터 길이의 스크린 앞을 통과한 뒤 다시 차에 올랐다. 금수산 기념궁전 방부처리된 김일성 전 주석, 주민들 ‘살균용 에어커튼’ 통과뒤 참배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인 9일을 맞아 고 김일성 주석이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고 나오는 평양 시민들. 평양/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5분 뒤 기념궁전의 거대한 기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념궁전은 서양식 벽과 기둥에 전통 양식의 지붕을 얹은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기자가 입구에서부터 위압감을 느낀 것은 현관에 ‘차려총’자세로 선 인민군이 지닌 칼리시니코프 에이케이(AK)-47 소총의 총검과 탄창이 은으로 도장돼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3m가 넘어보이는 김일성 전 주석 ‘립상’(입상)이 있었다. 홀에선 은은한 형광조명 아래로 장조풍의 장송곡이 흘렀다. 참배객들은 3열 종대로 서서 립상에 잠시 고개 숙인 뒤 ‘울음홀’로 들어갔다. 천정 높이가 3m를 넘는 건물이라 2층에 올라가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타야했다. 전원 키가 180cm를 넘어보이는 경호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이방인’들을 쳐다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방부처리된 김 전 주석의 관에 참배하고 나오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 일렬로 선 사람들 가운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여성들이 많았다. 방에 들어가기에 앞서 방문단은 살균용 에어커튼을 통과했다. 방은 족히 가로·세로 15m가 넘어보였다. 20룩스(lux)이하의 어두운 술집 정도 조도였다. 그 한가운데 혁명가, 정치가, ‘백두체’(김 전 주석의 필체를 다듬어 만든 글씨체.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흘려쓴 느낌이다. 김일성 종합대학 문패가 백두체로 씌여있다)글씨체의 창시자가 유리관에 누워있었다. 상페테르스부르크의 어머니 묘 옆에 묻히길 원했지만 방부처리된 레닌이나 화장 뒤 베트남 강산에 뿌려지길 원했지만 역시 방부처리된 호치민처럼 그도 ‘영원히 썩지않는’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창백해 보였지만 살아있는듯 피부에 탄력이 느껴졌다. 양복차림의 김 전 주석은 얼굴만 보였을 뿐 가슴께부터는 꽃다지에 파묻혀있었다. 관 주변의 하이라이트로 피부는 투명해보일 정도였다. 일렬로 줄선 참배객들은 먼서 관의 발 부분에서 4명씩 서서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그뒤 관의 왼편 → 머리맡 → 오른편에서 각각 한번씩 모두 네번 참배했다. 홀에는 장중한 음율이 흘렀다. 참배객들은 이런 식으로 관을 한바퀴 돈 뒤 방을 나왔다. 이웃한 방에는 김 전 주석이 세계각국에서 받은 훈장과 명예학위 등이 전시돼 있었다. 소련·동독·루마니아…이제는 사라진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름이 눈에 많이 띄었다. 김 전 주석이 생전에 누빈 세계각국 방문 경로, 김 전 주석이 탔던 승용차, 김 전 주석이 모스크바 횡단 여행중 탔던 집무용 열차도 전시돼 있었다. 30분 뒤 건물밖으로 나와 바라본 광장은 여전히 붐볐다. 평양공항으로 가는 길목마다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구호가 유독 자주 보였다. 같은날 12시 이륙하는 고려항공의 중국 심양행 튜보레프(Tupolev)Tu-154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양은 여전히 김 전 주석의 도시처럼 보였다. 첫날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를 맞이하고 보낸 것이 공항 건물 옥상의 거대한 김 전 주석 초상화였던 것처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