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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1292개 녹슨 표지판이 지탱하는 불안한 평화

등록 2018-07-14 15:36수정 2018-07-14 15:41

[토요판] 서재철의 DMZ이야기 ②군사분계선
군사분계선은 철조망 아닌
200m 간격 이어진 표지판들
대부분 부식되고, 유실된 것도
양쪽 합동으로 정비한 적 없어

군사분계선 근처서 잦은 교전
철책선에는 곳곳 ‘적침투 경고판’
무고한 남북한 청년들 희생돼
우발 충돌 막을 제도적 장치 절실

▶환경운동가. 녹색연합 전문위원. 비무장지대(DMZ)민북(민통선 이북) 산림생태복원사업 등의 목적으로 2000년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DMZ 내부와 민북지역을 조사 및 연구하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DMZ 248km를 직접 걸어서 탐사했다. <지구상의 마지막 비무장지대를 걷다>라는 책을 썼다. 남북화해시대,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DMZ의 생태와 지리, 역사, 사람 등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판문점의 군사분계선 표지판. 서재철 제공
판문점의 군사분계선 표지판. 서재철 제공

‘군사분계선 MILITARY DEMARCATION LINE’

녹슬고 색칠이 벗겨진 철판에 글자가 적혀 있다.

흔히들 군사분계선(휴전선) 하면 철조망이나 울타리 같은 모습을 떠올리지만, 실제 있는 것은 표지판뿐이다. 군사분계선은 약 200m 간격으로 설치된 1292개의 표지판으로 이뤄져 있다. 각 표지판 사이를 군사분계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래 65년 이상 그 자리를 지켰다. 군사분계선 표지판을 기준으로 양쪽이 각각 2㎞씩 물러나면서 비무장지대가 형성됐다.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남방한계선은 철책선으로 돼 있다.)

정전협정 당시 군사분계선 설치 규정은 “각 표지판에서 좌우의 표지판이 보여야 하며, 평야 등 직진지역은 500m, 굴곡선이나 경사가 급할 때는 300m가 넘지 않게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표지판의 관리는 “중국과 북한이 596개, 유엔사가 696개를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

군사분계선 표지판의 방향은 남북 양쪽으로 보이도록 돼 있다. 남쪽 방향에는 한글과 영어(‘군사분계선’과 ‘MILITARY DEMARCATION LINE)가 쓰여 있다. 북쪽 방향에는 한글과 한자(‘군사분계선’과 ‘軍事分界線’)가 쓰여 있다. 정전협정의 실체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문자들이다. 북한은 언제부턴가 군사분계선을 ‘중앙분계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민간인들이 군사분계선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곳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뿐이다. 그 외에는 남방한계선에서 망원경으로 관찰되는 곳이 한두 곳 있는 정도다.

멀리서 찍은 군사분계선 표지판. 서재철 제공
멀리서 찍은 군사분계선 표지판. 서재철 제공
위험한 표지판 정비작업

정전체제는 군사분계선의 경계를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군사분계선 표지판은 지금은 일부 사라진 것도 있다. 대부분의 표지판 글씨는 벗겨지거나 부식돼 있다. 하지만 정전체제의 당사자인 유엔사령부와 북한이 공식적으로 합의해 군사분계선 표지판을 정비한 적은 없다.

군사분계선 표지판 정비는 정전체제의 관리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보수 작업이 아니었다. 자칫 사소한 실수가 다시 전쟁으로 돌아가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북한은 군사분계선 표지판 정비를 금기시했다. 반면 유엔사는 몇 차례 정비 시도가 있었다. 최초의 군사분계선 표지판 정비는 1969년 3월15일이었다. 미군 2사단이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북쪽에 통보하고 파주 지역에 있던 군사분계선 제22호를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인민군의 총격으로 미군 한 명이 죽고, 세 명이 부상을 당했다. 여기에 부상자 후송을 위해 비무장지대로 접근하던 미군 헬기가 추락해 8명이 더 죽었다. 1978년 초반 주한미군 사령관 잭 베시는 군사분계선 표지판 교체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낡고 부식된 표지판을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미국 국방부와 백악관에까지 보고된 ‘보수 작전 계획’이 마련되었다. 1980년 4월 최종 작전 날짜까지 잡혔다. 그러나 불발로 끝났다. 당시 중국과의 관계와 북한의 반응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군사분계선 표지판은 유사 이래 한반도에 존재했던 안내판이나 표지판 중에서 가장 강한 구속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중지시킨 표지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전’ 상황 중에도 국군과 인민군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자주 충돌했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 군사분계선은 한반도를 포박한 일촉즉발의 뇌관이기도 했다.

가장 큰 충돌은 1973년 3월7일 철원 3사단 지역에서 일어났다. 군사분계선 표지판 정비를 하고 복귀하는 국군한테 인민군이 총격을 가해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군은 경고방송을 통해 인민군 쪽에 사격 중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사격이 계속되자 현장을 지휘하던 3사단 사단장은 포 사격 명령을 내렸다. 수십 발의 대포가 인민군 감시초소(GP)를 원점타격했다. 인민군은 ‘전군비상경계령’과 ‘동원령’을 선포했다. 유엔사는 담화를 통해 “북의 정전협정 위반으로 부상자가 발생, 구출 위해 자위적 조치를 취한 것” “전투할 의사는 분명히 없음”을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3사단장 박정인 준장을 사건 발생 한 달 뒤에 경질했다. 자칫 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위기의 사건이었다.

“과거 적 침투 사례

침투일시: 1968. 07.11.

침투경로: 적 162GP를 출발하여 남강 도섭 후 690고지 좌단 능선을 경유 47/46 협조점으로 침투

전과: 적 5명 사살” 남방한계선 철책선을 걷다 보면 이런 내용의 ‘적 침투 경고판’을 수시로 볼 수 있다. ‘남파 간첩이나 인민군이 침투했던 지점을 환기’시키기 위한 안내판들이다. 침투 일자, 인원, 교전 결과 등을 밝히고 있다.

남방한계선 철책선 근처의 ‘적 침투 경고판’. 서재철 제공
남방한계선 철책선 근처의 ‘적 침투 경고판’. 서재철 제공
경고판의 침투 일자를 보면 1968년 전후가 많다. 확실히 정전의 역사에서 1968년은 특별하다. 북-미 혹은 남북 간의 굵직한 사건이 이어진 해였다. 1월 벽두부터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이 발생했다. 11월에는 울진·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100여명이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높아진 해였다. 나라 바깥에서는 베트남전쟁을 매개로 냉전이 깊어갔고 남과 북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침투와 교전을 벌였다. 알려진 큰 사건은 북한이 저질렀지만, 남한도 뒤질세라 보복에 나섰다. 군사분계선을 단 10m라도 넘어오면 충돌로 이어졌다. ‘적’이 하면 ‘도발’이고 ‘아측’이 하면 ‘순찰’이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희생됐다. 국군과 인민군 모두 스무살에서 서른살 전후의 청년들이다. 교전은 양쪽 군 당국에는 작전일지나 전투기록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죽은 병사들의 가족과 부상당한 병사들에게는 평생 한과 트라우마로 남는다. ‘국방의 신성한 의무’나 ‘조국을 위한 혁명의 길’도 당사자의 고통과 가족들의 슬픔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유엔사와 인민군의 교전도 간혹 있었다. 그중 최대 교전은 1984년 11월2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졌다.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 직원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의 귀순을 저지하기 위해 인민군이 총격을 가하고 여기에 유엔사 경비병이 응전하면서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유엔사 소속 한국인 병사 1명이 죽고, 미군 1명이 다쳤다. 인민군도 3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 과정에서 30여명의 유엔사 군인과 인민군이 자동소총으로 교전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정전체제를 관리하기 위해 전쟁의 당사자들이 만든 곳이다. 전투나 교전을 중지시키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평화지대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남방한계선 철책선 근처의 ‘적 침투 경고판’.  서재철 제공
남방한계선 철책선 근처의 ‘적 침투 경고판’. 서재철 제공

판문점에서도 충돌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위험이 가장 높았던 사건도 판문점에서 벌어졌다. 1976년 8월18일 일어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다. 미군 장교 2명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과정에서 인민군들의 도끼에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당시까지 공동경비구역에서는 총기 등의 무장을 하지 않았다. 이 사건 현장은 유엔사 관측병의 감시카메라에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미국과 북한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가 사건의 실체를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미국도 북한도 선택이 분명했다. 미국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사건 당일 백악관 안보실에서 비상회의가 열렸다. 미국은 ‘국익과 국가의 명예가 유린된 사건’으로 규정했다. ‘전쟁을 포함한 선택 가능한 모든 수단’을 검토했다. 당시 실세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회의를 주재했고, 나중에 대통령이 된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가 중앙정보국(CIA) 국장이었다.

미국은 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를 자르는 군사작전을 진행하고 북한이 대응하면 본격적인 전투 상황으로 응수하기로 했다. 북한은 맞대응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김일성 주석이 사건 자체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다행히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 장소에서 다시 전쟁이 시작될 뻔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북쪽 지역에 있는 판문각. 서재철 제공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북쪽 지역에 있는 판문각. 서재철 제공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가장 최근의 교전은 1997년 7월16일과 1992년 5월22일 발생한 교전이다. 두 사건 모두 강원도 철원의 은하계곡에서 발생했다. 특히 1997년 7월 교전은 1990년대 이후의 가장 큰 충돌이었다. 군사분계선을 마주한 국군과 인민군 간의 교전이었다. 철원 김화읍 은하계곡 군사분계선에서 충돌이 일어나 양쪽 간에 300발의 소총 사격과 포 사격이 있었다. 교전으로 인민군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했다. 국군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해당 부대에서는 ‘완벽 작전’으로 정리하고 있다. 은하계곡은 한탄강 본류로 연결되는 지류다. 계곡 자체는 넉넉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평소 한탄강의 습기가 은하계곡까지 이어져 비 오거나 흐린 날에 안개가 자주 낀다. 그래서 군사분계선의 경계 자체가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사건 당일도 군사분계선을 순찰하던 인민군들이 월경을 하면서 대응하는 국군과 충돌이 발생했다.

2000년 이후에는 본격적인 교전이 없었다. 간혹 몇 발의 총탄이 오간 적은 있지만 병사들이 죽은 교전은 없었다. 군사분계선 근처의 교전은 언제든 전쟁의 재개로 이어질 수 있다. 우연이나 실수가 전쟁으로 비화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의 적극적인 통제와 관리가 필요하다. 지난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비무장지대의 교전을 근본적으로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상시 연락을 할 수 있는 시스템과 무장에 대한 상호검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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